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14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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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전라도軍 행주서 화력전 3만 日軍 격퇴 大勝
권율 영정 / 충장사 제공

  일본군은 북쪽으로 부터의 조명연합군과의 본격적인 한성 수성전(守城戰)이 벌어지기 전에 배후의 행주(幸州) 권율군부터 토멸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거에 휩쓸어 버리기 위해 3만 대군을 동원했다.

 총사령관 우희다수가를 비롯 소서행장, 흑전장정, 석전삼성, 소조천융경 등 각 번대 사령관 및 모리원강(毛利元康) 길천광가(吉川廣家) 소조천수포(小早川秀包) 등 부장급 장령들이 직접 참전,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지휘했다.

 병력 규모에서 10대1의 싸움이었다.

 아무리 조선군이 용맹하다 해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권율은 조선군 화기(火器)의 우수성을 알고 있었다.

 특히 이 싸움에 앞서 변이중이 火車 3백량을 만들어 전라도 본진에 바친것으로 되어있다. 火車는 文宗과 변이중이 각각 고안한 두 종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문종의 화차는 오늘날의 다연장 로켓포와 같으며 신기전(神機箭) 1백여발을 한번에 15발씩 연속 사격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고 변이중의 火車는 조선군 소총인 승자(勝字)총통 40여정을 장치하여 오늘날의 기관총처럼 연속사격이 가능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3백량 중 幸州전투에 몇량이 배치되었는지는 불확실하나 이 전투에서 火車가 위력을 발휘했다.

 이밖에 수차석포(水車石砲)라 해서 석탄(石彈)을 연속으로 날릴수 있는 신무기도 동원되었고 박보(朴普)의 경주(慶州)탈환전에서 맹위를 떨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물론 각종 총통(銃筒) 등이 모두 동원되었다.

 권율은 당시 조선의 우수한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각종 火器를 총동원 火力戰으로 10대의 적군에 섬멸적 타격을 주고 대승을 거두게 된 것이다.

 漢城안에 침투시킨 정탐자들로부터 적군의 동향이 계속 보고되어 왔다.

 2월12일 동이 트면서 멀리서 적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권율이 전군에 포효(咆哮)했다.

 "湖南의 3천 건아들아! 우리 모두 힘껏 싸워 이 싸움에서 함께 죽자"

 병사들의 함성이 山城을 뒤 덮었다.

 권율이 다시 명령했다.

 "적이 30보 이내로 접근할때까지 쏘지말라"

 3만의 대군이 산정의 좁은 전면에 나타나 거리를 좁혀왔다.

 소서행장의 제1대가 제1파로 공격을 감행해 왔다. 적의 조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으나 목책디의 토제(土堤)밑 참호에 몸을 숨긴 조선군이 꼼짝도 하지 않다가 적이 근접, 권율의 명령이 얼어지자 참호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일어나 일제히 활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두 명의 병사가 끄는 火車가 적진으로 돌진하며 사방으로 총탄을 퍼부었고 대완구로부터 진천뢰(震天雷)가 날아가 적병 밀집지대에 떨어지면서 연속 폭발했다. 수차석포에서도 석탄이 잇따라 날아갔다.

 天字 地字 등 각종 총통들에서도 계속 불을 뿜었다.

 불과 돌과 화살 세례에 제1파가 궤멸되고 제2파가 밀려 들어왔다. 석전삼성부대였다. 2파가 궤멸되자 제3파 흑전장정 부대가 몰려 왔다.

 누대(樓臺)를 만들어 수십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조총을 사격해 왔으나 누대는 곧 조선군 총통 사격으로 박살이 났다.

 마침내 총사령관 우희다수가의 제4대가 쏟아져 들어와 제1 목책선을 돌파했으나 권율이 火車를 적장쪽에 집중 돌진케 하면서 우희다수가와 석전삼성이 부상을 입었고 적군이 뒤로 물러섰다.

 제5파 길천광가 부대가 뛰어 들었으나 선두의 길천광가가 중상을 입고 말에서 얼어지자 곧 무너져 버렸다.

 제6파로 나선 모리원강과 소조천수포 부대가 제1목책을 뛰어 넘어 제2목책에 달라 붙었으나 조선군이 일제히 재(灰)주머니를 던져 눈을 뜨지 못하는 적군에 끓는 물과 화살세례를 퍼부어 격퇴했다.

 최후의 제7파로 소저천융경 부대가 승군쪽을 집중 공격해 백병전을 벌어졌을 때 경기수사(京畿水使) 이빈이 통진(通津)에서 배에 화사를 가득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권율군에 퍼준뒤 적 후방으로 상륙할 기세를 보이면서 마침내 일본군이 총 퇴각을 시작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하룻 낮의 격전 끝에 3천 방어군이 3만 공격군을 격퇴했다.

 권율은 추격군을 보내 퇴각하는 적군의 꼬리에서 130여명을 덮쳤다. 일본군은 물러나면서 전사자 시체를 모두 태웠으나 미처 태우지 못하고 유기한 시체가 200명이 넘었다.

 高山현감 신경희(申景禧)가 조정에 승전보고를 올렸고 명군 부총병 사대애가 부하장병들을 보내 현지를 시찰했으며 明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신종황제(神宗皇帝)의 훈상(勳賞)을 보내왔다. 조정은 권율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리고 이해 6월에는 조선군 총사령관(도원수)으로 임명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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