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0)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0)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1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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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수도 漢城으로 진공(進攻)

  평양성을 탈환한 조·명 연합군 선봉대가 1월19일 개성(開城)에 돌입했다. 청석곡(靑石谷)에서 일본군의 저항이 있었으나 30명을 죽이고 가볍게 밀어내 버렸다.

 개성은 전라도 진격에 실패한 6번대 소조천강경(小早川降景)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평양을 잃고 소서행장의 1번대가 한성까지 퇴각하자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함경도와 강원도 등 한성 이북지방의 일본군은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성의 일본군총사령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 등 수뇌진은 한성 이북의 전 일본군의 철수를 지시하고 한성 자체의 포기문제도 심각하게 거론했다. 평안도의 1번대 전병력과 황해도의 3번대 흑전장정(黑田長政)군, 강원도의 4번대 모리길성(毛利吉成)군 그리고 6번대 경비병력이 한성으로 모여 들었다.

 함경도의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군만이 후퇴하지 않았다.

 이로인해 조·명 연합군 사령부에서는 가등청중군이 남진한 연합군의 뒤를 공격하려는게 아닌가 우려했다.

 연합군 선봉대 明군 부총병 사대애(査大愛)와 조선군 경기(京畿)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이 임진강을 건너 한성부근까지 정찰한 뒤 25일 파주(坡州)에 진공했다. 이날 이여송이 재겅에 입성하여 연합군 수뇌들 사이에 한성 진공문제가 거론 되었다.

 한성의 일본군 병력의 5만여명이며 함경도 가등청정군이 합세하면 7만명 규모가 될 것으로 연합군은 판단했다.

 조기 진격론과 신중론으로 갈라졌다.

 明군 유격장 전세정(錢世楨)외에 명군 장수들 태반이 평양 승전의 여세를 타고 조기 진격론이었고 조선군측에서는 특히 도제찰사 유성룡이 신속한 진격을 주장했다.

 한성의 일본군 수뇌진에는 패전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어 한성 포기론까지 검토되고 있었으나 소조천융경만이 강경론이었다. 자신만이 예정지역을 점령하지 못했던데 대한 자책감도 있었겠으나 60세 노장의 눈에는 평양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명군이 일본군을 얕보고 경솔한 작전을 감행하는 허점이 내다 보였다. 그는 군사를 한성 안으로 들이지 않고 외곽에서 연합군과의 일전을 주장했다.

 25일 사대수와 고언백이 작은 병력을 거느리고 파주에서 창능(昌陵:예종릉:고양군 소재)까지 나왔다가 일본군 수색대와 부딪쳐 기겁을 하고 도망치는 일본군 60여명의 목을 자르는 전과를 올리고 사령부에 보고했다. 일본군을 더욱 우습게 보게 되었다.

 26일 아침 이여송이 갑옷을 챙겨입더니 가정(家丁:사병) 3천여명과 부총병 孫수겸 조승훈(祖承訓) 삼장(參將) 이녕(李寧)과 그 직속병졸만 거느리고 개성문을 나섰다. 전세정이 영문을 물으니 적정을 살피러 나간다는 것이었다. 사대수와 고언백의 3천명이 선두에 섰다.

 이여송 일행이 임진강을 건너 한성 북방 80리 지점의 조산(鳥山)까지 진출하여 이날 밤을 지냈다. 후속부대가 도착되면서 2만명으로 병력이 증강됐다.

 27일 일본군 수색대의 활동으로 이같은 명군의 동향이 한성에 보고되고 곧 소조천융경을 선봉장으로 한 일본군 주력이 성문을 열고 나와 임진강 쪽으로 급히 전진했다.

 3천명을 거느린 입화통호(立花統虎)가 제1대로 선두에 섰고 8천명을 거느린 소조천융경이 제2대로 뒤를 따랐으며 소조천수포(小早川秀包)의 제3대 5천명, 길천강가(吉川康家)의 제4대 4천명 모두 2만명으로 편성된 선봉군은 소조천융경이 지휘했다. 흑전장정(黑田長政)의 제5대 5천명, 석전삼성(石田三成)의 제6대 5천명, 가등광태(家藤光泰)의 제7대 3천명, 우희다수가의 제8대 8천명 모두 2만1천명으로 편성된 본군은 우희다수가 지휘했다.

 朝明연합군은 4만명 대 병력의 북상을 모른채 사대수와 고언백의 3천명이 앞을 섰다가 여석령에 진을 친 일본군 500명과 부딪쳤다.

 이리하여 여석령(礪石嶺)에서 벽제관(碧蹄館)사이 저막리(酒幕里) 월천(越川) 망객령(望客嶺)을 잇는 40여리 협곡에서 朝明연합군 2만명과 일본군 4만이 뒤엉켜 물고 물리며 포위와 역 포위,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朝明연합군에 불리하게 전개됐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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