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1)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12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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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이북 침공군 전면퇴각 방어전 포기 南下
오승우 행주대첩 / 독립기념관 제공

  평양전투의 승리감에서깨어나지 못한채 적을 얕보았다가 기습을 당한 셈이었고 일본군은 패전의 불명예를 씻겠다는 투지로 결사적이었다. 협곡이어서 기마전에 능한 명군보다 백병전에 능한 일본군이 우세했고 대포중심의 명군보다 조총 중심의 일본군이 화력면에서도 우위에 있었다. 병력도 일본군이 많았다.

 소조천융경이 선봉군 2만명을 침착하게 지휘하여 朝明연합군을 몰아 붙였다. 한때 제독 이여송이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며 그때 한 겨울에 찬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여송이 군사를 물려 파주로 퇴각했다. 한성 진격이 저지된 것이다.

 28일 이여송이 전의를 잃고 군사를 철수 시키려 했다. 유성룡 이하 조선의 장수들이 말리자 명군 우협대장 장세작(張世爵)이 조선군 순변사 李빈을 발로 걷어찼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명군이 파주를 떠나 임진강을 건넜고 29일에는 개성까지 후퇴했다.

 벽제관에서 일격을 맞고 명군이 정신없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던 29일 정문부(鄭文孚)의병군의 끈질긴 공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이 성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해버려 마침내 함경도 길주성(吉州城)이 수복되었다.

 그무렵 길주성은 정문부의병군에 포위된채 새해를 맞았으며 성안의 일본군은 군량과 말먹이 모두가 떨어져 굶주림에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성의 총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고 있던 안변부의 가등청정이 길주성에 갇힌 일본군을 두고 떠날수가 없었다. 부장 좌좌정원(左左政元)에 군사 수백명을 주어 그들을 구출해 오도록 했다.

 구출부대가 살을 도래낼듯 차가운 북풍을 뚫고 마천령을 넘어 북상했다.

 27일 정문부 의병군 6백명이 임명(臨溟)에 미리 나가 매복하고 있다가 28일 아침 구출부대를 덮쳤다.

 적은 추위로 조총이 제대로 발사되지도 않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오촌(吾村)권관 구황(具滉) 安東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련원 첨정 박은주(朴銀柱) 판관 인원심(印元沈) 등이 달려들어 적을 쳤다. 의병군은 길주성을 향해 필사의 탈출을 꾀하는 적병을 60리나 뒤쫓았다. 길주성 20리 전방에 매복하고 있던 종사관 원충노(元忠怒)군이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적을 에워쌓으나 일본군이 죽을 힘을 다해 포위망을 뚫고 길주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29일 아침 길주성을 정찰하고 돌아온 척후병이 북우후(北虞侯) 한인제(韓仁濟)에 일본군이 밤사이 도망치고 없다고 보고해 왔다.

 길주성의 일본군은 물론 단천(端川) 이원(利原) 북청(北靑) 홍원(洪原) 등지의 일본군이 모두 본대가 있는 안변부로 퇴각하고 말았다.

 明軍이 퇴각하고 있는 사이에 조선군쪽에서는 이 전쟁 3대 승리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거둔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權慄)이 수원근교 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나와 한성 서쪽 행주고지(幸州高地)에 부대를 이동하고 곧 방책을 서둘렀다.

 처음 권율은 명나라 대군이 내려오면 한성주둔 일본군이 幸州를 치러 오지 못할 것으로 알고 임시 주둔지로만 생각 했으나 양주(楊州)에 올라와 았던 전라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의견을 들어 조방장 조경(趙儆)으로 하여금 2일만에 목책(木柵)을 서둘러 두겹으로 둘러치게 했다.

 흔히 행주산성(幸州山城)이라 하지만 천험의 요새에 쌓은 그런 山城이 아니고 한강변의 야산(野山)에 목책을 둘러친 야전용의 산벽(山碧)였다.

 권율은 여기에 전라도에서 거느리고 온 1만 군사중 조방장 조경, 승장 허영(虛英) 등과 함께 2천3백명을 배치하고 전라도 兵使 선거이(宣居怡)에 4천명을 주어 수원북방 광교산(光敎山)에 배치 했으며 행주와 광교의 중간 지점이 되는 한강건너 맞은편 양천(陽川)(현 김포)에 전라 소모사(召募使) 변이중에 남은 군사 3천명을 주어 지키게 하여 각각 권율의 지시에 따르도록 했다.

 그 무렵, 朝明연합군은 明군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주력을 거느리고 개성에 있었고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순변산 李빈과 함께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明나라 부총병 사대애(査大愛)의 명군 선봉대와 파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전라도 의병장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의병군이 강화에 그리고 충청감사 許욱이 충청도 군사가 한강 입구 통진(通津)의 문수산성(文秀山城)에 배치되어 있었다.

 한성에서 20리 정도밖에 안되는 幸州에 권율의 전라도 군사가 진출한 사실은 일본군을 긴장시켰다.

권율(權慄)은 6번대장 소조천강경(小早川降景)에는 웅치(熊峙)·이치(梨峙)전의 패전을 안겨주어 전라도 진격을 좌절 시켰고, 그가 독성산성에 올라와 진을 치고 있는 동안 일본군 총사령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직접 토멸에 나섰다가 끝내 찾지 못하고만 조선의 맹장이었다.

 한성 북방에서 남하하고 있는 朝明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는 마당에 권율의 전라도군이 한강 이남에 진출해 있고 그 선봉이 한성의 코 밑까지 나타난 것이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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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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