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의 풍모를 지닌 선각자 백봉 라용균 선생을 기리며
대인의 풍모를 지닌 선각자 백봉 라용균 선생을 기리며
  • 이여산
  • 승인 2020.01.0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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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봉 라용균’은 1895년 11월 25일 출생한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에 본적을 둔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에 우애 깊고, 의협심이 강하여 약한 친구가 당하는 경우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며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풍전등화로 어려운 조국을 구하기 위해 큰 포부를 품은 그는 1918년경 일본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재학 중,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와 세계 제1차 대전 종결로 인한 약소국의 독립 분위기에 따라, 동지 백관수, 김도연 등 7명과 함께 적지에서라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비밀리에 회합을 가지며 기회를 엿보았다. 구체적인 실현을 위하여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는 한국인 남녀 학생들을 규합하여,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적지에서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는데 재정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귀국한 그는 송진우, 김성수, 최린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학생운동에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에 자극 된 국내의 동지들도 기미년 3월 1일 삼일운동을 중앙중학교 중심으로 계획하게 된 도화선이 된 것이다. 독립선언 후 주모자가 체포되고 막후 연루자들도 미행을 당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4월경 상해로 망명하였고, 고국의 부친은 수차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고초를 당하했다.

 상해에서는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정부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 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동년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위원에 선임되어 국민의 대 결속과 독립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에 기여하였다.

 1940년 2월 11일 조선인도 일본식 성씨로 이름을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는 미명으로 ‘창씨개명’이 시작되었다. 창씨를 하지 않으면 공직에 나갈 수 없었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민원 사무를 처리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너도 나도 창씨개명을 하는 분위기였지만, ‘운학리 라씨’집안은 끝내 창씨를 거부하였다.

 대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지만, 인륜과 정의를 존중하는 ‘백봉 라용균’은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요,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해방 후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한국 민주당’을 결성하여, 야당 지도자로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대선각자이다. 제헌 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국회 사무국장과 국회 내의 치안 위원장을 맡았다.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그는 금도를 지닌 정치인으로서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전형적인 신사였고 대인의 풍모를 지닌 정치가였기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라용균은 1984년 89세의 일기로 선종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국회에서는 백봉 라용균의 뜻을 기리고자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하여, 매년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한 국회의원, 소신 있는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국회의원, 국민에게 헌신해온 국회의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대의를 위하여 일하고,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청렴한 정치가를 국민들은 원한다. 현재 같은 정치 환경일수록 떠오르는 인물 ‘백봉 라용균’은 한국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 정치가이다.

 이여산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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