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 정용기
이달의 독립운동가 : 정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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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1.06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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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기(1862.12.13~ 1907. 9. 2) -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산남의 의병장, 충효의 별이 되다
 

정용기 선생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부친 정환직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였으며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나라에 운이 없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문명과 종사가 무너지는 것이 을사5적들 때문이라는 것을 지탄하고, 충성심 있는 의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과 왜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 백성들의 원한을 풀 것과 우리 대한독립만세의 기치를 전 세계에 자랑하기 위해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이에 영남지역에서 1,000여 명의 의병이 모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어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신돌석 의진과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진군하던 중 경주 진위대 간계로 대구감옥에 수감되어 4개월간 고초를 겪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으로 당장 의병을 일으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몸을 안정시키고 있던 때에 대구에서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ㆍ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외채 1,300만원을 정부가 갚을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우리 국민의 손으로 갚고자 한 일종의 경제적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ㆍ성주ㆍ김천ㆍ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동참하였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었으며 선생은 회장으로 취임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선생은 1907년 4월경 의진을 다시 결성하여 청하·영천·청송 등지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여러차레 전투를 벌여 적군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관동으로의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의병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1907년 9월 주요 의병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선생이 전사한 후 부친 정환직이 의진 총수를 맡았으나 일본군 영천수비대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 중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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