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0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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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북경의 울타리" 明 국익위해 조선 출병

  겨울철로 접어들어 시베리아 대륙이 냉각되면 일대에 차갑고 건조한 시베리아 고기압(siberian anticy clone)대가 형성되고 시베리가 고기압대는 만주벌판과 조선의 북부지방에 혹심한 추위를 몰고오는 북서 계절풍을 일으킨다.

 겨울철 1월중의 월평균 기온이 서울이 섭씨 영하 4.9도인데 두만강 중·하류일대는 영하 13도이고 삼수갑산(三水甲山)지역은 영하 18도가 된다. 甲山지역의 최저운도는 영하 41도(1927년 1월19일)를 기록한 일도 있다.

 건조한 고기압대로 겨울철 만주지방을 넘어오는 북풍은 살을 에인다.

 개마고원의 장진(長津:갑산)지방은 9월28일이면 첫 얼음이 언다.

 조선의 남쪽 부산지방 1월중 평균기온은 섭씨 영상 2도, 제주도는 영상 4도이며 위도상 비슷한 일본의 九州(쿠슈) 四國(시코쿠) 中國(쥬코쿠)지방은 영상 2도~6도의 분포를 보인다.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 병사들은 모두가 이들 따뜻한 남쪽나라 출신들로 겨울을 모르고 살던 일본인들이었다.

 여름철 군복을 입고 쳐들어 온 이들 일본군 병사들에 조선 북부지방의 혹독한 겨울 추위는 죽음보다 더한 시련이었다.

 明軍 부총병(副總兵) 조승훈(趙承訓)과 함께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자격으로 조선에 온 심유경(沈惟敬)이 9월1일 평양성 북쪽 강복산(降福山)밑에서 소서행장(小西行長)과 만나 50일간의 휴전 약속을 쉽게 받아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일본군쪽의 절박한 사정 때문이기도 했다. 월동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한 일본군으로서 조·명 연합군과 결전을 벌일수 없는 처지였고 우선 시일을 벌고 보아야할 상황이었다.

 평양성 북쪽 부사원현에 경계선을 긋고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明과 조정은 그에 앞서 8월18일 병부우대랑(兵部右待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비왜군무(經略備倭軍務)로 임명하고 총포 등 병기와 차량 등을 제작하는 한편 군사를 징집, 조선 출병을 준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8월26일 경락 송응창이 소주(蘇州), 밀운(密雲), 천진(天津), 영평(永平) 4道의 수비병력을 증강하고 군용자재를 보충했다. 일본군이 明까지 쳐들어 올것에 대비한 것이었다.

 9월3일 明황제 신종(神宗)이 설반(薛潘)이란 칙사(勅使)편에 칙서(勅書)를 보내왔다.

 요양(遼陽) 정병 10만명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설반이 조선의 사정을 듣고 돌아가 신종에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에 明나라가 조선에 출병하게 되는 객관적인 이유가 정확하게 설명되고 있다.

 "요진(遼津)은 경사(京師:서울=北京)의 팔(譬비)고 朝鮮은 遼津의 담장입니다. 2백년간 복건(福建)과 절강(浙江)에 왜적이 침범했으나 요양은 그러하지 않았으며 이는 조선을 담장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만약 왜적이 조선을 점령한다면 요양이 하루도 안심할수 없으며 배를 타고 오면 京師의 앞뜰인 천진도 화를 당할 것이며 경사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빨리 출정하면 조선 사람 힘을 빌려 왜적을 치는 것이 되고 늦게 출정하면 왜적이 조선사람을 이끌고 와서 우리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결국 明나라 자신의 국가안보를 위해 출정해야 한다는 국익판단에 기초를 둔 예방전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10월16일에 신종황제는 이여송(李如松)을 제독(提督)으로 임명했다. 이여송은 고조(高祖)가 조선 평안도에 살던 조선 사람으로 이여송 자신도"나는 원래 조선사라미었다"고 조선계 중국인임을 밝혔다.

 11월10일 明나라 측에서 "7만 군사가 산해관(山海關:하북성의 북동쪽 요동만에 접해있는 요충:만리장성의 동쪽 끝 천하제일관)을 지났다. 압록강까지는 明이 군량을 담당하고 강을 넘어서는 조선이 담당하라"고 통첩이 왔다.

 전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안주(安州)에서 明나라 군사가 먹을 군량과 말먹이를 조달하여 의주(義州)와 평양(平壤)사이 길 주변에서 쌓아놓은 작업을 독찰했다.

 26일 유격장 심유경이 평양성에 들어가 소서행장과 다시 회담을 벌였다.

 심유경이 "두 왕자를 돌려 보내고 먼저 군사를 물리라"고 했고, 소서행장이 "평양성은 내 줄수 있으나 대동강 이남은 안된다"고 맞서 성과 없었다.

 12월 상순 제독 이여송이 요동에 도착, 경락 송응창과 회의를 갖고 원정군 편성을 마쳤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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