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8)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8)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05 00:0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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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明연합군 평양성 탈환위해 남진 시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성탈환도 병풍’ 中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양성탈환도 병풍’ 中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좌협대장 부총병 이여백(左協大將 副總兵 李如柏)

 중협대장 총병관 양원(中協大將 總兵官 楊元)

 우협대장 부총병 장세작(右協大將 副總兵 張世爵)

 병력합계 4만3천명. 추가 8천명

 12월10일 유격장 전세정(錢世禎)군 1천명이 압록강을 넘으면서 명군의 도강작전이 본격화 되었으며 25일에는 이여송(李如松)이 左右中協 대장들을 거느리고 넘어와 28일 의주를 출발, 평양으로 향했다.

  이 무렵 조선군은 平安감사 이원익(李元翼) 병사(兵使) 이빈(李賓)이 군사 4천명을 거느리고 평양 북방 순안(順安)에서, 左방어사 이일(李鎰)이 군사 2천명을 거느리고 江東현에, 右방어사 김응서(金應瑞)는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江西현에 각각 진을 치고 평양의 소서행장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12월 들어 전라도 감사 권율(權慄)이 휘하 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火車발명가) 조방장(助防將) 조경(趙儆) 의병장 임희진(任希進) 변사정(邊士貞) 의승군장 허영(虛英)이 그간 정병으로 키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水原근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진출했다. 장차 수도 한성 수복작전을 펼 작정이었다.

 한성의 일본군 총사령관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가 2만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와 군사를 3진으로 나누어 산성을 포위하고 공격 했으나 권율이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응전하지 않았다. 권율은 틈을 보아 정예 기병을 풀어 적진의 허술한 곳을 들이치고 돌아오게 하는 등 교란작전만 계속했다. 마침내 조선군의 기습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일본군이 포위를 풀고 한성으로 철수했으며 과천(果川) 용인(龍仁) 등 부산과의 주보급로 경비만 강화할뿐 함부로 성밖을 나와 돌아다니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이 산속에서 나오고 경기도 일원이 수복되어 갔다.

 권율은 수도 탈환전을 위해 가까운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이동했다. 두달 후 여기서 이 전쟁 3대 승리중의 하나인 幸州대전이 벌어진다.

 동장군(冬將軍)의 엄호를 받으며 명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속속 집결하고 사기를 회복하여 일본군과의 전투에 자신을 얻은 조선의 관군과 의병군이 조선 전역에서 일본군을 맹렬히 몰아 붙이는 가운데 조선과 일본과의 7년전쟁 1차전 첫해 임진년(壬辰年) 1592년이 저물고 두번째의 해 계사년(癸巳年) 1593년이 밝았다.

 조·일전쟁 1차전 두번째의 해 계사년은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 최선봉 1번대 소서행장의 평양성 주둔군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 일본군을 몰아내고 조선의 제2수도를 탈환하는 승전으로 그 서막을 장식한다.

 이해 조선군은 일본군과 모두 15회의 대소 전투를 벌이는데 이중 13회가 조선군측의 공격전이었고, 12회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가운데 명군과의 연합작전은 2회에 불과했고 조선의병군 단독전투는 1회에 그쳤으며 조선관군 단독전투가 6회, 의병군 참전아래 관군이 주도한 전투가 3회였다.

 1593년 1월2일, 이여송의 明군 주력이 안주에 도착했다.

 평안도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직책을 갖고 明軍을 맞은 유성룡이 이여송과 만나 평양지도를 놓고 작전을 협의했다.

 이여송은 "일본군은 조총뿐이나 우리는 5리 6리를 쏠수있는 대포(大砲)가 많다"며 화력에 자신을 보였다.

 4일 숙천(肅川)까지 진격하여 선봉장 사대수(査大受)를 순안으로 먼저 보내 심유경 사신 일행으로 꾸며 적장을 평양교외 부산원(斧山院)으로 꼬여내도록 했다. 속아 넘어간 소서행장이 장수 죽내길병위(竹內吉兵衛:다께우찌 기찌베이)로 하여금 군사 23명을 데리고 나가 영접케 했다.

 소서행장은 조선 백성을 세뇌, 첩자로 이용해 왔는데 유성룡이 안주에서 김순량(金順良) 등 간첩 일당을 일망타진한 뒤 일본군은 성 밖의 사정이 깜깜해졌던 것이다.

 선조도 5일 대신들과 평양성 공격에 따른 선후책을 의논하고 특히 군량확보 대책을 세웠다.

 조선군 도원수(都元帥:총사령관) 김명원은 右방어사 김응서 左방어사 정희현(鄭希賢)으로 하여금 8천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성 공격에 참전케 했으며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1천5백,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의 7백 모두 2천2백명의 의승군(義僧軍)이 이 전투에 참가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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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석 2020-04-14 13:17:39
글에 의승군장 허영(虛英)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영 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확인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