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9)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9)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2.07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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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군 평양 수복, 피아 사상(死傷) 1만 넘어

  6일 아침 일찍부터 조·명 연합군의 공성전(攻城戰)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성밖에 녹각책자(鹿角柵子:사슴뿔처럼 만든 방책)를 둘러쳐 놓았고 성벽에는 조총 사격이 용이하도록 완벽한 시설을 갖추어 놓았으며 갖가지 장애물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로 구축해 놓았다. 일본군 수비병력은 1만5천여명으로 파악되었다. 조선 백성들이 일본군의 칼날 아래서 부역을 하고 있었다.

 城 북쪽 목단봉(牧丹峯)에 일본군 2천여 조총병이 배치되어 있었다.

 명군 부총명 오유충(吳柳忠)군사와 조선 의승군 부대가 쳐 올라갔다가 거짓 패하여 후퇴하자 추격해 온 일본군을 포위했다.

 조선군 8천여명은 성 남쪽 함구문(含毬門) 공격을 맡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데 일본군이 뒤로 돌아와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이날밤 일본군 3천여명이 성문을 열고 이여송 양원 등 대장들의 진영을 강습했으나 격퇴되었다.

 7일 이여송이 본진을 보통문(普通門) 앞에 바짝 당겨 설치하고 조선의 정희현과 김응서로 하여금 경(經)기병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적을 유인해 내도록 했다.

 8일 이틀간의 탐색전으로 일본군의 전력을 판단한 이여송이 이날 총 공세를 폈다.

 성 주변 요소에 사정거리에 따라 포진지를 구축하고 각종 화기가 배치됐다.

 대장군포(大將軍砲), 위원포(威遠砲), 자모포(子母砲), 연구포(連球砲), 불랑기포(佛郞機砲) 등이 일제히 불을 토하면서 화전(火箭)과 장전(長箭)이 날아갔고 산탄(散彈)이 터지고 화염이 번

 졌다. 특히 불량기포는 프랑스군 대포를 모방한 최신 화기로 성능이 우수했다.

 대포 터지는 소리로 천지가 진동했다.

 읍성의 서남족 함구문은 명군 부총병 조승훈군과 조선군 이일 김응서의ㅣ 8천명이, 서북쪽 보통문은 명군 좌협대장 양원군이, 칠성문(七星門)은 우협대장 장세작군이 그리고 북쪽 목단봉은 부총병 오유충군과 조선 의승군장 유정의 승병 2천2백명이 각각 공격을 맡았으며 이여송이 말을 타고 진두지휘 했다.

 외성과 읍성이 점령되고 일본군은 중성으로 물렸다가 북성으로 밀려 만수대(萬壽台)와 을밀대(乙密台) 고지의 토굴속으로 숨어들어 조선백성들을 방패로 내세우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조·명연합군의 각종 포화가 집중되고 일본군의 조총소리와 피아간의 단말마의 비명이 교차하는 가운데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날 피아간 사상자가 1만여명에 이르렀고 백병전중에 목이 떨어진 일본군이 1천285명이었다. 조선 백성 1천15명이 살아 나왔다.

 피아의 희생이 늘자 이여송이 공격군을 뒤로 물리고 일본군에 퇴로를 터주었다.

 궁구물박(窮寇勿迫) : 궁지에 몰린 적을 지나치게 몰아 붙이지 않는다는게 孫子의 兵法이고 중국군의 전통적인 전술이다. 적이 결사적이 되면 아군 피해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날 밤, 살을 에이는 혹독한 추위속에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패주하는 일본군은 참상을 극한 것이었다.

 강가의 배들을 모아 불을 질러 앞길을 밝혔다. 반년 전, 6월15일 조선에 상륙한지 두 달만에 여기까지 짓쳐들어 올 때의 무적의 강병 일본군의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전사자는 물론 부상자까지 그대로 버리고 헐벗은채 죽음의 공포에 떨며 남쪽으로 필사의 도주행각을 벌였다.

 길은 열어 주었어도 곱게 보내지는 않았다.

 명군 삼장(參將) 이녕(李寧)군 3천병력이 달아나는 일본군 사냥에 나서 359명을, 조선군도 추격에 나서 방어사 이시언(李時彦)군이 60명, 황주(黃州)판관 鄭화군사가 120명의 일본군을 뒤쫓아가 죽였다.…

 9일 조·명 연합구는 평양성을 수복했다.

 패전때의 군대란 어느나라 군대든 자기살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소서행장이 평양서 대규모 희생을 내며 사투를 벌이는 사흘동안 급보를 받은 봉산(鳳山)주둔 대우길통(大友吉統)의 6천 일본군이 구원 출전은 커녕 남쪽으로 도망가 버렸고 가등청정(加藤淸正)군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소서행장의 1번대는 9일 용천성(龍泉城)을 지나고 개성(開城)을 지나 18일 한성(漢城)으로 철퇴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7월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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