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 춘고 이인식 선생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 춘고 이인식 선생
  • 이종희
  • 승인 2020.01.02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산 월명공원에는 시내를 바라보는 근엄한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재산을 헌납하고, 우매한 국민을 깨우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교육에 헌신하신 독립 운동가이며 교육자인 고 춘고 이인식 선생(1901~1963)이다.

 옥구군 임피면 만석꾼 부호 이태하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니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며 누리고 살 수 있었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한 춘보 선생은 서울 보성고보에 유학하면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노블리스의 귀족 출신이었으니 인생의 편한 길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젊은 혈기가 불 꺼진 조선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구국의 대열에 뛰어든 것이다.

 1919년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의 이면에서 춘보 선생은 피 끓는 청년들과 함께 투쟁을 펼쳤다. 보성고보 3학년 때 학생대표로 연희전문 김원벽, 보성전문의 강기덕, 경성의학전문의 한위건 등과 함께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태극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며 거사 시간에 합류하도록 독려했다. 파고다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셈이다.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해 군중을 미국 영사관으로 인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이로부터 연일 서울역과 남대문 지역에서 맹활약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청을 높였다. 태극기를 흔들며 세계만방에 독립의지를 널리 펼치는 시위군중의 선봉에 서계신 의연하고 용맹스런 선생의 모습이 떠오르며 고개가 숙여진다.

 그 후 3월 5일 밤, 서울 종로 송현동 62번지, 이인식 선생의 자택에서 각 전문대 대표 및 고보생 대표 63명이 그간의 투쟁 내용의 평가와 사후 대책 등 발전적 토의가 이뤄졌다. 수많은 옥중 독립투사들로부터 해외 활동 상황과 독립운동자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제2 항일 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고보생으로서 전문대 학생들과 독립운동에 관한 숙의를 한 춘고 선생의 높은 정신은 오로지 독립에 대한 열정이 몸에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 중심으로 활동을 계속하던 차 일본 경찰에 43명이 체포되어 선생은 10개월 형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겪어야 했다. 출소 후, 독립운동가로 낙인찍힌 선생은 국내에서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어 중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당시 시가 8,000원/246,474평/현 시가 200억 원 정도)을 처분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그 외에도 개인적으로 동지들을 위하여 쓴 돈까지 계산한다면 헤아릴 수 없다.

 가진 자들은 재산을 지키고 더 가지기 위해 일제에 빌붙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선생도 일제에 협력하며 자신은 물론 일가의 안위를 도모할 수 있는 기회와 유혹이 있었건만, 끝내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조달에 앞장서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사례이기에 후세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춘고 선생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1923년 일본 동양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항일결사 ‘금우회’를 결성하고 월보를 발간하면서 조선독립의 의지를 조선 학생들에게 알리는 데 앞장섰다. 또다시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감시가 계속되자 아예 중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춘고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투쟁으로 우리 민족이 그렇게도 고대하던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다. 이제는 자신의 심신을 편안하게 돌보아도 되련만, 제3의 독립운동인 교육자의 길에 나섰다. 6.25전쟁으로 학생이 없는 임피중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였던 1953년 11월 15일, 춘고 선생이 본교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해 사재를 기증하면서까지 우선적으로 학생 모집을 했다. “배워야 한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는 일념으로 인재양성에 헌신했다. 조선 말기, 국제 정세에 어둡고 네 편 내 편만 다투는 정쟁이 백성들을 제대로 보았겠는가. 그러기에 가난했고, 가난했으니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익히 알았기에 선생은 기꺼이 교육자의 길에 오른 것이다.

 만석꾼 부호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니 편안한 인생길은 확보된 삶이었지만, 조국의 독립이 우선이었던 춘고 이인식 선생이다. 학생신분으로서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생의 몫을 과감하게 처분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쾌척할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일제가 몰랐을까? 그로부터 선생의 가족들이 일제에게 받았을 수모가 만만치 않았으리라.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 춘고 선생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도, 가족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에서 우선순위가 밀렸다. 하물며 많은 재산쯤이야.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건네고 받은 ‘임정공채증서 8매’를 받은 증거가 <한국독립운동사> 등에 게재되어 있고,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았다. 이 같은 증서와 훈장이 춘고 선생의 업적에 보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증서와 훈장의 의미를 되새기며 춘고 이인식 선생의 고귀했던 삶이 헛되지 않게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는 것이 미력이나마 보답하는 길이 아닐지.

 더불어 후학 양성을 위해 교육자의 길을 걸으신 춘고 선생의 고귀한 정신 속에는 또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배워야 한다는 일념이 가득했으리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우쳐야 국력이 강해지지 않던가. 1963년 63세에 작고하는 날까지 살신성인하며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교육사업에 헌신하신 삶이었다. 1974년 10월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51호에 선생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독립운동가로 교육자의 길로 일생을 살아가신 춘고 이인식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

이종희(수필가, 안골은빛수필문학회장 역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