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6)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6)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3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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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수비군 화공전펴 2만 日軍 격퇴...金時敏 전사

  9일 결전의 날이 왔다. 성밖에서는 단성(丹城)현쪽에 있던 적군이 의병장 김준민(金俊民)군에 격퇴되었고, 살천(薩川)방면에서는 간준장(稈俊將) 정기용(鄭起龍)과 조경형(趙敬亨)에 패퇴되었다.

 때맞춰 김성일의 응원요청을 받고 달려온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崔敬會)와 임계영(任啓英) 의병군 2천명이 도착, 성안 수비군과 호응하면서 밖에서 일본군을 건제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은 이날 밤 계약을 써 수비군을 밖으로 유인해 낸뒤 결전을 벌이려 했다. 여기저기 불을 놓아 환하게 밝힌 가운데 군막을 철거하고 모든 자재들을 수레에 실어 전군이 철수하는 모습을 보인뒤 일제히 불을 끄고 성밑으로 기어들었다.

 김시민이 속지 않았다. 적군은 하는 수 없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으며 밤을 지새워 성안팎에서 아비규환의 사투가 벌어졌다. 10일 새벽이 되고 아침이 되면서 적군이 퇴각을 시작했다. 아침이 되었으나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 천지가 캄캄한 가운데 적군들은 전사자들을 모아 민가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화장을 했다. 시체 타는 냄새가 성안팎에 진동했다.

 오전 11시쯤 되어 적군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지옥의 폐허만이 남았다. 격전의 날 밤에 김시민이 이마에 총탄을 맞고 대승의 환호오 맛보지 못한채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쓰러지자 곤양(昆陽)군수 이광악이 지휘를 맡아 뒤를 수습했다.

 사천현감 정득설도 성밖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조정은 김시민을 선무공신 2등(宣武功臣 二等)에 올리고 영의정 벼슬을 내렸으며 시호(諡號)를 충무(忠武)라 했다.

 이달 18일 경기도 감사 심대(沈垈)의 1천여 관군이 강원도와의 접경지역인 삭령(朔寧)에 주둔, 장차 한성 수복전을 꾀하고 있다가 철원(鐵原)주둔 일본군 이동우병군(伊東祐兵軍)과 내통한 성여해(成汝諧)란 자의 부역행위로 기습을 당해 4백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패전을 겪었다.

 그러나 9월 이후 전세전반은 일본군에 계속해서 불리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이순신 함대에 부산포가 쑥밭이 되었고 경주성을 탈환당했으며 9월17일에는 전라도 금산성을 스스로 포기, 철수했고 전력을 다한 진주성 공격에 실패했다.

 함경도에서도 조선군의 압력에 견디기 어려워 길주성(吉州城)이남지역으로 주력을 철수시켰고 비록 두차례의 공격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조·명 연합군의 평양성에 대한 압력은 갈수록 강화되어 나갔다.

 보급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일본군에는 그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동장군(冬將軍)이 다가오고 있었다. 10월이면 조선의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등은 벌써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가 되었다. 일본ㄱ순 선봉대 대부분은 조선의 제주도 보다 더 남쪽지방인 구주(九州)의 따뜻한 지방출신인데다가 여름 군복을 입고 쳐들어온 뒤 겨울 군복 등 군수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대군의 월동준비를 현지 약탈만으로 해낼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일본군은 진격하는 곳마다 노략질과 분탕질을 일삼아 초토화시켜 버렸다. 황량한 겨울 벌판에 내던져져 얼어 죽거나 굶어죽을 위기로 몰리고 있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2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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