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29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숭인군 진주성앞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

24일 늦게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고 곧이어 선봉대와 본진이 뒤따라 왔으나 고지일대에 수많은 깃발을 꽂아놓고 위세를 떨치고 있는 유숭인군에 어떤 계략이 있는지 몰라 그날을 보낸 일본군이 25일 상오 총 공격을 가해 왔다.

 유숭인이 중과부적으로 창원성으로 퇴각했는데 적군 일부가 성까지 추격해와 마산포(馬山浦)로 다시 철수했다.

 일본군은 창원, 함안 등 일대에서 분탕질을 치면서 완만하게 전진했다. 10월4일에야 일본군 성봉이 진주 동쪽 고지에 나타났다. 그 사이 마산포에 철수했던 유숭인군이 진주성에 도착했으나 성을 지키고 있던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입성을 거절했다. 김시민으로서는 병사인 유숭인이 입성하면 주장(主將)이 바뀌게 되어 지휘체계에 혼란을 우려했다. 결국 유숭인군은 城밖에서 싸우게 됐다.

 城外에 진을 친 유숭인에 사천(泗川)현감 정득설(鄭得說) 가배양(加背梁:거제군) 권관 주대청(朱大淸) 등의 4백여 군사가 가세했으나 곧 서을 포위중인 일본군에 겹겹이 에워싸이고 말았다. 사면에 적을 맞안 유숭인 정득설 주래청군은 성안으로 부터의 아무런 응원도 받지 못한 가운데 종일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죽어갔다. 탈출한 군사는 극히 적었다.

 드디어 조일전쟁중 조선군측의 3대승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막을 올렸다.

 일본군은 여름 이후 각지의 전세가 차차 부진해지고 있어 경상우도 조선군 주력이 주둔하고 있는 진주성을 공파함으로써 전세를 회복할 수 있을 뿐아니라 전라도로 진공할 수 있는 길목을 트게 된다고 판단하고 대군을 동원했다.

 진주성에는 한달전 판관(判官)이었다가 목사(牧使)로 승진한 39세의 김시민, 판관 성수경(成守慶), 곤양(昆陽)군수 이광악(李光岳), 전만호 최덕량(崔德良), 권관 이찬중(李贊重), 군관 이납(李納), 군관 윤사복(尹思復), 함창(咸昌)현감 강덕용(姜德龍) 등이 군사 3천8백명을 거느리고 있었고 응원군으로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최강(崔康), 이달(李達)이 수 미상의 의병군을 거느리고 와 있었다.

 김시민은 목사 취임후 수성(守城)준비에 만전을 다해왔다. 장수들과 협력체제는 물론 관민간의 인화를 다져 성안의 군사와 백성들이 한몸이 되어 전투준비를 해왔다. 특히 火力과 火器의 위력을 알고 있는 김시민은 각종 총간(銃간) 70여 병(柄)을 주조하여 요소에 배치하고 사격훈련을 실시해 왔으며 화약 510여 근(斤)을 만들어 비축했다. 상당량의 비격진천뢰와 질려탄도 제작해 두었다.

 김시민이 소수의 수비병으로 끝까지 진주성을 지켜낸 것은 이같은 화력의 사전 준비의 힘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5일 일본군 기마병 1천여명이 나타나 싸움을 걸어왔으나 김시민은 화살 한 대 탄환 1개라도 헛되어 쓰지말라며 꼼짝않고 지키기만 했다.

 6일 일본군이 3개 공격대로 나누어 1대는 동문밖 순천당산(順天堂山)위에 진을 치고, 다른 1대는 봉명루(鳳鳴樓)앞에 진을 치고, 또다른 1대는 봉명루앞의 적과 수시로 합세하면서 공격을 해왔다.

 순천당산의 적진에서 조총수 1천여명이 나와 일제히 사격을 가해와 총알이 우박처럼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민가의 대문짝을 수없이 떼어다가 세워놓고 쉬에 숨어 조총을 난사해 왔으며 포(砲)사격을 가해오기도 했다. 의병장 최강과 이달이 결사대를 이끌고 나가 적군을 기습하거나 부근 산에서 횃불을 올려 적을 교란했다.

 7일 일본군이 하루종일 조총사격과 활을 쏘아 공격했으나 수비군이 잘 막아냈다. 일본군이 진주성 주변 10리 안팎의 모든 마을에 불을 질러 잿더미를 만들었다.

 김시민은 하루의 전투가 끝나고 저녁이 되면 악공(樂工)을 불러 거문고도 타고 퉁소도 불게했다. 수비군의 마음의 안정을 돕고 전군에는 여유를 보였다.

 8일 적군이 수천개의 죽제(竹梯:대나무 사다리)를 성벽에 걸고 기어오르려 했ㅇ며 3층 높이의 산태(山台)를 바퀴를 달아 밀고 들어오며 조총과 화살을 성안에 퍼부어 댔다.

 소나무가지와 짚더미 등으로 성호(城濠)를 메우며 달려 붙었다.

 수비군측 70여문의 銃간들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철환이 날아가 떨어질때마다 적군이 혼비백산 했다. 화약봉지를 속에 넣고 묶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 수없이 던지자 화약이 터지면서 불붙은 장작개비가 사방으로 날라 성호를 메운 소나무더미에 불이 붙고 적병이 수없이 타죽었다.

 대나무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적병은 수비군의 돌과 화살괄 끓는 물 세례를 뒤집어 썼다.

 성밑에 달라붙은 적병들은 질려탄으로 박살을 내고 적병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박격포(진천뢰)공격이 가해져 한꺼번에 수십명씩 날려보냈다. 이날 밤 고성(固城)현령 조응(趙凝) 진주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남강 건너편 보현(普晛)에 나타나 횃불을 올리고 수비군을 응원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24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