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27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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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신무기 동원 경주성 탈환
비격진천뢰 / 사진=국립진주박물관 전시
비격진천뢰 / 사진=국립진주박물관 전시

 조선수군 이순신 이억기 원균의 전라·경상 연합함대가 부산 앞바다에서 적선 1백여 척을 깨뜨리고 대승을 거둔 9월1일 황해도 연안성(延安城)에는 의병장 이정암이 5백 의병군 2천 주민과 함께 흑전장정군 5천명의 나흘에 걸친 공격을 막아내고 성을 지켰으며 평양성에서는 明나라 유격정군 심유경(沈惟敬)이 소서행장(小西行長)과 첫 강화회담을 벌이고 있었다.

 9월8일 개전초기 4월21일 일본군 2번대 가등청정군에 짓밟힌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성(慶州城)이 적에 빼앗긴지 넉달 보름만에 경상 좌병사 박진(左兵使 朴晉)이 지휘하는 관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박진은 개전때 밀양(密陽)부사로 군사 5백을 거느리고 동래성(東萊城) 밖 소산역에서 일본군 1번대 선봉과 부딪쳤으나 당시 좌병사 이각(李珏)군사가 내빼는 바람에 일격을 맞고 밀양으로 퇴각한바 있었으며 이각이 처형된뒤 좌병사가 되었다.

 박진은 두차례 공격전 끝에 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7월27일 권응수(權應銖)의병군의 영주성 수복은 경상좌도의 의병군과 관군을 자극했다.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의병 도대장(都大將)에 임명된 김호(金虎)가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 진사 최신인(崔臣隣)의 이본군을 치러 가다가 8월2일 경주부근 노곡(奴谷)에서 일본군 5백여명과 부딪쳐 이를 포위 공격한 끝에 50여명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바 있었다.

 이에 안강(安康)에 있던 박진은 경주성 탈환을 결심하고 권응수 의병장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아 정세아(鄭世雅) 의병장의 5천 의병군과 관내 16개 읍병(邑兵)등 1만 군사를 거느리고 8월20일 야간행군으로 경주에 도착, 성을 포위했다.

 날이 밝을 무렵, 성 주변 민가에 불을 질러 연기와 화염으로 성이 뒤덮이게 한 뒤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는데 성의 동쪽에서 일본군 대 병력이 달려와 박진군을 역포위하고 달려 들었으며 성안에서도 북문을 열고 적군이 쏟아져 나와 협공을 했다. 박진군이 6백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박진은 安康 본진으로 돌아와 기필코 경주성을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이날 관군 5천을 이끌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야간공격을 강행한 끝에 다음날 9일 성을 탈환했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박진은 조선군의 최신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즉 박격포를 동원 성안의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일본군이 신무기의 위력에 놀라 스스로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치게 했다.

 저녁 늦게 경주서 주변에 도착한 박진 군사가 성을 포위하고 밤새워 공격을 퍼부으면서 대완구(大碗口)로 진천뢰를 성안에 잇따라 쏘아댔다.

 성안의 일본군이 "땅에 떨어진 철구(鐵球)를 둘러싸고 신기하게 보고 있는데 이게 난데없이 터져 철편이 사방으로 별처럼 퍼지면서 삼사십명이 즉사했고 수십명이 폭풍에 쓰러졌다."

 여기저기 떨어진 철구가 터지면서 한꺼번에 적병 수십명씩이 죽어 자빠졌다. 지붕에 떨어지면 폭발과 동시에 집이 통채로 날아가고 불이 붙었다. 놀라고 당황하여 날이 밝기 무섭게 남문을 열고 박진군의 포위망을 뚫으며 전군이 서생포로 달아나고 말았던 것이다.

 9월에 들어 金海일대 주둔 일본군은 진주성(晋州城) 공격준비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한성쪽의 여유 병력을 남하시켜 병력을 보충했다. 장강충흥(長岡忠興)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 목촌중자(木村重慈) 등 이른바 일본군 10將의 지휘아래 2만 병력이 김해성에 집결하고 24일 진주성을 향하여 출발했다.

 그러나 진주성 공격군은 창원(昌原)의 노현(露峴:창원군 동면 신방리 서쪽 고지)에서 개전 초기 함안(咸安)군수로 있다가 경상右兵使가 된 유숭인(柳崇仁)의 2천군사에 의해 저지됐다.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수복된 창원성에 있던 유숭인이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에 관한 정보를 듣고 노현에 포진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24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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