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1)
  • 김재춘
  • 승인 2020.01.2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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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朝廷)·官軍이 전승을 주도...매도는 歷史왜곡
부산포 해전 / 현충사 제공

  전쟁이 터지고 4백년이 된 오늘의 시점에서 당시의 조·일전쟁 경과를 되돌아 보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조선이 이전전쟁에서 이기고도 이긴줄을 몰랐다는 점과 함께 승리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줄기찬 전쟁지도와 관군의 전쟁주도로 이루어졌는데도 조정과 관군이 사실이하로 매도되고 무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에반해 의병과 명군의 역할은 사실 이상으로 확대되고 미화되어 있다.

 이 전쟁 전기간중 기록으로 채집되는 단위 전투로 대소 약 105회가 집계되고 있다. 이중 조선군측이 공격전을 벌인 전투가 68회, 방어전이 37회로 2대1로 조선군이 공격적이었다.

 이 가운데 조선군측의 승리가 65회, 패배가 40회로 조선군의 우세로 나타나고 있다.

 승전 65회 전투중 조선관군 단독전이 31회로 압도적으로 많으며 조선과 명군연합전이 7회, 의병군의 참전아래 관군이 주도한 전투가 9회 그리고 의병군 단독 전투가 12회, 관군의 참전아래 의병군이 주도한 전투는 6회였다.

 정부군(관군)과 민병(의병)으로 구분해 보면 87대18로 단연 정부군 쪽이 전쟁 전반을 주도했다.

 그런데도 이 전쟁을 마치 의병군이 도맡았고 명군이 달려와 구원해 주어서 조선이 멸망하지 않은 것으로 오늘에 이르러 인식되고 있는 것은 어쩐 사연일까?

 이에 대한 연구와 검증은 따로 필요로 되는 부분이거니와 일제 식민지 사학자들의 역사 왜곡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105회의 전투 가운데 첫해인 15992년에 72회가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중 조선군의 공격이 45회 방어가 27회 그리고 조선군의 승리가 42회 패배 30회로 첫해 전투부터 조선군이 공격적이었고 승세를 잡았었다.

 월별로 보면 전쟁이 터진 4월의 9회는 모두 조선군의 방어전과 패배전이었으나 5월에는 7회중 5대2로, 6월에는 15회중 9대6으로, 특히 7월에는 13회중 10대3 그리고 8월에는 9회중 8대1로 조선군측이 공격적으로 전환했으며 공격마다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조선수군의 10전 전승이 포함된다.

 4월13일 부산에 상륙한 뒤 5월3일 수도 한성을, 6월15일에는 제2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은 여기서 전진이 정지 당한채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5월7일 옥포(玉浦)해전 이래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 이순신 함대에 의해 연전연패, 남서해로를 차단당해 수군 10만의 평양 합류가 좌절된데다가 곽재우 등 경상우도 의병군 봉기와 전라도 관군 및 고경명 의병군에 의해 일본군 6번대의 전라도 진격이 이치와 웅치에서 저지되고 말았다. 뒤이어 영천성과 청주성이 각각 권응수 경상좌도 의병군, 조헌 영규 충청도 의병군의 공격을 받아 탈환 당했다.

 부산에서 한성, 평양까지 1천7백리에 걸쳐 길게 뻗어난 주보급로가 초기 패전의 충격에서 깨어 재편성된 주변의 조선 관군과 의병군의 간단없는 교란작전으로 위협받아 후방 군수지원이 뜻대로 되지 못해 전력은 갈수록 약화되어 나갔다.

 청주성을 빼앗김으로써 금산(금천)-추풍령-청주-용인-한성을 잇는 제2의 보급로를 잃고 말았다.

 7월17일에는 임시 출동한 조승훈(趙承訓) 明군 선발대가 평양성에서 첫 전투를 벌였다.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 일본정복에 나선 麗·元 연합군과 일본군간 전쟁이래 318년만의 아시아 3국간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전쟁은 이미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이며 일본군은 수세로 몰리고 조선군과 명군 그리고 의병군의 공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차 평양성 수복전은 조·명 연합군의 패전으로 끝났다.

 明나라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이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6월 중순경부터 압록강을 건너와 7월 초순 조선군 총 사령관(도원수) 김명원(金命元) 휘하 3천명의 조선군과 연합군을 편성, 평양 북방 순안(順安)군에 집결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1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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