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대반격 (2)
  • 김재춘
  • 승인 2020.01.22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원주관민 4천명 老將 김제갑 치악산서 결사항전

조승훈(趙承訓)은 일본군을 얕보고 매우 자만에 빠져 있었다.

 척후장으로 나가있던 순안군수 황원(黃援)이 "평양성의 일본군이 한성쪽으로 성을 빠져나가고 있고, 조선 여인이 성 위에서 이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하라"고 외쳤다고 보고해 왔다. 때마침 비가 내려 부대이동에 어려움이 많은데도 조승훈이 공격을 강행했다.

 17일 아침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에 다달아 보니 성문이 열려있고 일본군이 보이지 않았다. 明군이 선두에서 보통문(普通門)으로 들어가 대동관(大同館) 앞까지 진출했을때 사방에서 조총탄과 화살이 쏟아져 나왔다. 완전히 포위가 되고 말았으며 일본군의 계략에 빠진것을 알았으나 너무 늦었다.

 유격장 사유(史儒) 천총(千總) 장국충(張國忠) 등 장수들을 비롯한 명군 태반이 전멸하고 조승훈을 비롯한 수식명만이 살아 그대로 달아났다. 18일 안주(安州)를 지나 청천강을 건너고 그길로 遼東까지 달아나 ’조선군이 일본군에 투항하여 졌다’고 허위보고를 하는 바람에 조선 조정이 사신을 보내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明조정도 놀라 천진(天津) 여순(旅順) 등 주요 도시의 수비를 강화하고 군사를 추가로 모집하여 동정(東征:조선출병) 준비를 본격화했다.

 평양성의 일본군 1번대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조·명 연합군의 첫공격을 계략으로 격퇴 시킨뒤에도 성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피난 조정이 조선군 단독으로 평양성 수복전을 펴기로 결정하고 순찰사 이원익(李元翼) 순변사 이빈(李賓)군 5천명을 중앙공격군으로 순안에, 순변사 이일(李鎰)군 5천명을 左공격군으로 江東에 그리고 조방장 김응서(金應瑞)군 1만명을 右공격군으로 江西에 전진 배치하고 별장 김억추(金億秋) 수군 약간명을 대동강 입구에 잠복시켰다.

 8월1일 평양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하루종일 공방전을 폈다.

 조선군 전과기록이 대개 그러하듯 이 전투의 전과도 분명치 않다. 조방장 김응서가 적장의 목을 베고 용전을 벌였다해서 방어사로 승진했다. 이날 저녁 조선군은 각각 주둔지로 되돌아 갔다.

 이날은 충청도에서 조헌, 영규 의병군이 청주성을 수복한 날이었다.

 8월25일에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雉岳山)의 영원산성(嶺原山城)에서 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지휘하는 수비군과 백성들 4천여명이 악명 높은 4번대 모리길성(毛利吉成)군 3천여명의 공격을 받아 사투끝에 전원 옥쇄했다. 김제갑은 이때 나이 68세였다.

 모리길성의 4번대는 강원도 일대를 휩쓸고 경상도까지 쳐 내려갔다가 다시 북상, 원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원주에는 성을 디킬만한 군사와 무기가 부족했다. 4월28일 도 순변사 신립의 충주전투때 정예 강원도 군사를 출전시켰다가 대부분 병력과 무기를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제갑은 원주성 동쪽 30리 치악산 남쪽 기슭의 영원산성이 천험의 요새여서 남은 군사와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산성으로 올라가 방어태세를 갖췄다.

 김제갑이 23일 무인 박종남(朴宗男)에 1천병력을 주어 원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가리령(可里嶺)에 매복, 적을 막도록 했는데 박종남이 태만하여 적에 노출되어 역습을 받고 패퇴했다.

 24일 일본군이 산성을 에워싸고 25일 아침 일찍부터 공격해 왔으나 사방이 절벽인 천험으로 하루를 지켰다. 그러나 저녁에 일본군 결사대가 성의 한곳을 뚫고 들어와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김제갑과 아들 시백(時伯)이 전사하고 부인 李씨가 자결했다. 조정에서 충성과 정열(貞烈)과 효도의 가문으로 높이 포상했다.

 8월 중순경 경상도 감사 김수는 의심스러운 적의 동향을 포착하고 이를 이순신에 알려왔다.

 "위로 쳐 올라갔던 적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는 움직여 양산(梁山) 김해강(金海江)쪽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짐짝들을 가득 싣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망치려는게 아닌가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는 그 무렵 일본군은 진주성(晋州城) 공격작전을 준비중이었고 공격군 편성과 출전후 부산지역 수비군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한성에서 약 7천500명(가등광태 1천명, 목촌중현 3천5백명, 소야목강은조 1천명, 조욕내선 2백명, 강본중정 5백명)의 병력을 남하시켰다. 이들은 은밀히 행동하기 우해 낮에는 숨고 밤에만 이동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우수사 이억기(李億棋)와 협의하여 적군의 본산인 부산을 치기로 하고 좌우 수군의 전함과 병력을 출동시켰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17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