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생강과 지역민의 자부심
완주 생강과 지역민의 자부심
  • 정명철
  • 승인 2019.12.1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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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전국에서 열세 번째, 전북에서 두 번째로 완주 생강농업이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세종실록지리지 등 조선시대 지리지에 기재된 토산물 목록을 분석한 결과를 학회지에 투고하기 위해 논문으로 작성하던 중이었다.

 완주 생강은 조선시대 3대 지리지라 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여지도서(1765년)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례여서 내심 농업유산에 지정되기를 바라고 있던 터였다.

 완주 생강과 같은 토산물은 오래 전부터 국가의 재정을 충당하는 조세로 거둬들이기 위해 특별히 관리해온 지역의 농산물, 임산물, 수산물, 광산물, 공예품 등을 말한다.

 이런 토산물은 지방에 파견된 관리가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이 되기도 하고, 중국 황실에 바치는 진헌(進獻)이 되기도 하면서 백성들의 고역을 더해주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생산량이 월등하게 많고 품질이 우수하여 지역의 자부심이 되어왔다.

 완주 생강은 조선전기부터 현재까지 600여 년 동안 지역을 대표하는 토산물로 자리를 잡으면서 지역민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려온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완주 생강과의 인연은 3년 전에 시작되었다. 농업유산 후보지역을 발굴하는 연구과제를 수행하던 중 완주에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들장 생강굴이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봉동읍으로 달려갔다.

 당시 토종생강 농사를 고집스레 짓고 있는 생강연구회 총무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면서 생강굴을 찾아냈다.

 이미 옛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거나 현대식으로 완전히 개량한 집을 빼고는 대부분 생강굴을 보전하고 있었다. 마루 밑 토방에서부터 안방 구들장 끝까지 이어진 좁고 기다란 굴속으로 머리를 디밀고 들어가 보기도 했다.

 여러 차례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지만 신음보다 탄성이 먼저 새어나왔다. 온도와 습도 유지가 관건인 생강의 저장력을 높이기 위한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구들장식 생강굴에 대한 기록이‘산가요록(1450년경)’에서 비롯되니 역시 600년을 이어온 유구한 전통지식인 셈이다. 이후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 신청서에서 구들장식 생강굴이 508개나 남아있다는 전수조사 자료를 보고 다시 한 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완주 생강의 역사와 구들장식 생강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토종생강의 보전 노력이다.

 청골, 황골, 백골로 불리는 토종생강이 그것인데 이 지역 농민들은 수확량이 많은 개량종의 유혹을 뿌리치고 생강연구회를 만들어 토종생강 재배와 보급에 힘쓰고 있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농업기술을 전승해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생강을 파종한 후 볏짚이나 생강풀을 덮어주는 전통농법을 통해 토양미생물과 곤충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 수준 높은 토양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도입한 옥수수 혼작도 주목된다. 여름이 길어지면서 뜨거운 볕에 생강이 말라죽자 키 큰 옥수수 그늘을 이용해 생강을 보호하려는 지혜로운 재배방식이라 할 수 있다.

 국가중요농업유산 지정 발표를 앞두고 초조한 마음으로 찾아온 완주생강농업유산추진위원장은 자꾸 봉동초등학교 교가를 읊조렸다.“금옥 같은 넓은 터전 생강 명산지~”를 반복하는 그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다른 지역에 밀려 생산량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완주의 생강 농민들에게 역사와 전통은 분명 과거가 아니다. 여전히 현재이자 미래이다. 농업유산 등재를 계기로 완주 생강이 새롭게 도약하기를 기대해본다.
 

 정명철   농촌진흥청 농촌환경자원과 농업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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