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6)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6)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1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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恨맺힌 반민(叛民)들 두 왕자와 대신들 잡아 적에 넘겨

일본 침공군 가운데 조선영토 북쪽 끝까지 가장 깊숙이 진격을 했고 가장 용맹했던게 가등청정(加藤淸正)의 2번대였다.

 6월17일 함경도 안변부(安邊府)를 떠난 가등청정은 가든 곳마다 성이 텅 비어있어 피흘리지 않고 전진을 계속하여 함흥에 들어가 그곳에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왕자가 회령(會寧) 방면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고 왕자들을 뒤쫓았다.

 함경도와 평안도 등 이른바 서북지방은 조선왕조 이래의 지역차별로 불만이 높았다.

 함흥출신인 태조 이성계는 서북지방 무장들의 도움으로 고려의 王씨로부터 왕권을 빼앗아 李씨 왕조를 열었으나 개국후 "서북지방 사람들을 높이 쓰지 말라"고 후손들에 명했으며 세조때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차별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에따라 서북지방에는 높은 벼슬아치가 나지 않았고 문벌(門閥)주의로 인해 한성의 양반들과 서로 혼인도 못해 마침내 이들 지역은 사대부가 없는 고장이 되고 말았다.(택리지 팔도총론 함경도편)

 한성에서 함경도로 부임해온 벼슬아치(京官)들은 이곳 배성들을 무시했고 수탈을 일삼아 조정에 뿌리깊은 반감이 심어져 있었다.

 그로인해 함경도는 전쟁중 가장 많은 반란이 일어났고 두 왕자를 비롯하여 가장 많은 수령·방백들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함경도 관찰사 유영립(柳永立)과 판관 유희진(柳希津)이 함흥이 떨어지면서 산속으로 도망해 들어갔으나 유희진은 함흥에서, 유영립은 북청(北靑)에서 백성들의 밀고로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 유영립은 북청사람 김응전(金應田)이 스스로 감사의 종이라 속여 적의 병영으로 들어가 문관이라 적병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고 업고 도망나와 그길로 피난조정으로 달려갔다.

 6월12일 철령(鐵嶺)에서 방어진을 폈다가 적군에 겁을 먹고 도망쳐 갑산(甲山)까지 갔던 남병사(南兵使) 이운(李運)은 그곳 백성들이 남병사인줄 알고 잡으러 덤비자 밭 가운데 토굴 속에 숨었다가 격투끝에 맞아 죽었고 백성들이 목을 베어 일본군에 바쳤다.

 7월18일 가등청정군은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북진했다. 마천령은 백두산(2,744m)에서부터 해발 2천m가 넘는 고봉들을 이끌고 함경도를 남북으로 나누며 동해까지 이어진 마천령산맥의 동해쪽에 해발 725m로 푹 꺼져 남쪽의 서천(瑞川)과 북쪽의 성진(城津:해정창海汀倉)사이를 넘나들게 하는 고갯길이다. 마천령산맥은 이름 그대로 하늘을 만질만큼 높은 산맥이다.

 함경도 북병사 韓극함이 함경도 6진의 1천여 병력을 모아 마천령을 막으려 했으나 일본군이 먼저 넘어버려 북쪽 성진읍의 정해창에서 이날 일본군과 부딛쳤다. 첫날 싸움에서 적근을 倉내에 몰아붙여 유리한듯 했던 조선군이 밤사이 적군의 역습에 걸려 19일 아침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분산되어 버렸다. 적이 두만강까지 전역을 석권했다.

 한극함이 목숨을 건져 두만강너머까지 도망갔다가 되돌아와 경흥(慶興)으로 들어갔다 백성들에 붙잡혀 일본군의 포로로 넘겨 졌으나 양주에서 탈출, 피난조정을 찾아 갔다가 적과 내통했다하여 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

  반란이 번졌다.

 명천현(明川縣)의 사노(寺奴) 정말수(鄭末守)가 반란을 일으켰고 경성(鏡城)의 관노(官奴) 귀석(貴石)과 성인손(成仁孫)이 우후(虞候) 이범(李範)을 잡아 일본군에 투항했다. 한성에서 출장 나왔던 병조좌랑 서성이 적에 잡혔다가 뇌물을 주고 탈출해 나왔으며 온성부원관(穩城府員官) 강신(姜信) 등 부사 이수(李洙)를 잡아 적에 투항했다. 경성 판관 이홍업(李弘業))이 적에 잡히자 부인과 며느리가 자살했다.

 24일 마천령을 넘어 회령까지 쫓겨간 두 왕자와 수행했던 조정의 고관들이 모두 그곳 백성들에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짐으로써 반란이 절정에 달앴다.

 경성 관노 국세필(鞠世弼)과 회령의 사노진무(士奴鎭撫) 국경인(鞠景仁) 등이 두왕자와 수행했던 전 좌의정 영중추(領中樞) 부사 김귀영(金貴榮), 前병조판서 호소사(號召使) 黃정욱, 그의 아들이며 전 우승지(右承旨) 준군(護軍) 황혁(黃赫), 회령부사 문몽헌(文夢軒) 등을 모두 붙잡아 가등청정에 넘겼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1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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