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15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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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속 함경도서 정문부 의병군 봉기

지역차별과 학정에 대한 혹독한 보복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가등청정은 조선의 두 왕자를 포로로 잡는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가등청정은 경성부(鏡城府)는 국세필, 회령부(會寧府)는 국경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뒤 2번대 주력은 길주이남에 배치하고 그 자신은 두 왕자를 비롯한 포로들을 데리고 처음 떠났던 안변부(安邊府)로 내려왔다.

 함경도 의병장 농포(農圃) 鄭문부 28세의 청년장교로 북도 병마평사(北道 兵馬評事(정6품)였다. 전투중에 총을 맞아 부상한 몸을 이끌고 경성 바닷가 외딴곳에 사는 유생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숨어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에 잘못 잡히면 죽는 판국이었다.

 9월에 들어서 명나라 원군이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함경도의 민심도 바로 잡히기 시작했다.

 지달원이 동지 최배천(崔配天)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鄭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뒤이어 산속에 숨어있던 경성부사 정견용(鄭見龍), 경원부사 오응태(吳應台)가 나와 합세했고 함흥부사 나정언(蘿廷彦), 고령(高嶺)첨사 柳경천, 군관 오대남(吳大男)이 산중에서 나와 참여했으며 서북보(西北堡)만호 고경민(高敬民), 전 만호 강문우(姜文佑) 등이 참전 3천병력의 큰 군사가 되었다.

 의병군인지 관군인지 구별이 어렵다.

 정문부 의병군은 곧바로 경성부를 들이쳐 국세필 일당 13명을 베었고, 명천(明川)의 정말수를 토벌했으며 정문부 의병군 봉기 소식을 들은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 오윤적(吳允迪) 등이 국경인 일당의 목을 베어 정문부에 바쳤다.

 9월16일 정문부 의병군 소식을 들은 일본군 2번대 부장 가등우마윤(加藤右馬允:가또 우마노죠)군 1,500명이 길주(吉州)에서 올라와 경성을 공격했으나 의병군 강문우(姜文佑) 기병대의 기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함경도에서도 몰리기 시작했다.

 함경도 북병영(北兵營)과 북수영(北水營) 등 조선의 북방요새인 경성(鏡城)을 수복한 정문부 의병군은 그동안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수령들이 거의 모두 그의 휘하에 모여들어 병력규모가 수천명의 대군이 되었다.

 주요 장수들은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 정문부, 경성부사 鄭견룡, 고령첨사 柳경천, 경원부사 吳응태, 종사관(從事官) 元충노, 오촌권관(吾村權官) 具황, 방원만호(防垣萬戶) 韓인제, 안원권관(安原權官) 姜문우, 옥연만호(玉連萬戶) 安옥, 종사관 인원침, 군관 黃사원, 군관 朴은주, 권관 高경민, 길주목사 정희적, 윤성찰방(輪城察訪) 최동망, 경관 첨사 이응성.

 가등청정은 부장 가또 우마노죠에 병력 1,200여명을 주어 길주를 지키게 했다.

 10월은 함경도에서는 초겨울이다. 추위에 익숙하지 못하고 겨울준비가 충분치 못한 일본군은 수시로 성을 나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식량과 의류의 노략질에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그간 조선군의 이렇다할 본격적인 저항을 받아본 일이 없어 경비를 매우 소홀히 했다.

 10월21일 정문부는 吉州城이 적을 치기 위해 치밀한 작전계획을 짰다.

 정견룡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병력 1천명을 주어 명천에 진주케 하고 유경천을 좌위장(左衛將)으로 병력 1천명을 주어 해정에, 오응태를 우위장(右衛將)으로 병력(말상末詳) 주어 서북보(堡)에 각각 진주케 하고, 원충노에서 병력 200을 주어, 아간창(阿間倉)에 진주하고 있다가 적군의 동정을 살펴 공격케한다는 것이었다.

 30일 아침 적군 1천여명이 성을 나와 해정(현 성진) 가파(加坡)리 쪽으로 행군해 나갔다. 원충노는 즉시 정문부에 보고했고 정문부는 각 군에 통보하고 귀로의 적군을 급습키로 하고 대기토록 했다. 적군은 이날 하오 4시쯤 약탈한 물건을 말과 소등에 가득 싣고 경계도 하지 않은채 길주성을 향해 장평석현(長坪石峴:일명 돌고개)을 넘으로 했다.

 원충노 한인제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적군을 덮치고 구황, 김문우, 안옥, 인원침, 황사원, 박운주군이 잇따라 가세했다. 포위망을 빠져나간 적군이 길주성 동쪽 장덕산(長德山)으로 도망치자 산정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경민군이 내리 닥쳤으며 10리를 추격하여 적군을 전멸시켰다.

 이날 정문부 의병군이 벤 적군의 머리가 8백여 급이 넘고 왼쪽귀를 잘라 피난조정에 보낸게 825개였다.

 정문부 의병군의 활약으로 길주성 북쪽의 함경도는 거의 정상을 되찾은 가운데 길주성내의 적군 잔류병력은 꼼짝않고 성을 지키고만 있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1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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