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광복에 몸 바친 전북 열사들의 우국충정
조국광복에 몸 바친 전북 열사들의 우국충정
  • 송희
  • 승인 2019.12.12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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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송희 시인
송희 시인

 전라북도는 우리나라의 서남부에 위치한 8개의 도 중 하나이다. 도청은 전라북도 전주에 있으며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었던 수부이다. 또한 전라감영은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동학정신을 꽃피웠던 최초의 집강소이다.

 이에 전주시 곳곳에서는 후백제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후백제학회가 발족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전라정신을 찾기 위한 전라정신 연구회도 시동을 걸었다. 이곳은 백제의 옛 땅이었고 조선왕조의 뿌리가 되어 1300년을 넘는 긴 역사를 지닌 채 한국문화의 거점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전라정신이라 함은 올바른 역사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있기까지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의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으며, 그들의 격렬했던 목소리가 허공중에 맴돌고 있음을 통감해야 한다. 우리는 보통 애국지사하면 유관순열사,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정도 인지하고 있는 터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열사들의 우국충정을 사람들 가슴속에 스며들게 전달하려는 전라북도 광복회의 의도는, 항일 독립운동을 조명하자는 의도를 뛰어넘어 같은 민족끼리 철컥거리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민족혼의 불씨를 다시 피울 것이라 확신한다.

 

 □ 의병활동

 한말 의병활동은 1895년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일본의 경복궁 침범(1894)과 명성왕후 시해사건(1895) 단발령(1895)등이 직접적 계기였다. 그 당시 전북은 동학농민혁명 후유증으로 격동의 소용돌이를 겪은 심각한 상태여서 의병 봉기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후에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킬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면암 최익현과 고창의 고석진, 진안의 최제학 등이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의병활동의 시발이 된 정읍 태인 무성서원 결의는 전북혁명정신에 불을 붙인 불씨가 되었고, 역사 속에서 계속 칭송되고 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전북 최초의 의병을 주도한 군산 출신 임병찬은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자기 재산을 털어 백성을 구했다. 최익현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하다 쓰시마 섬으로 끌려갔다. 후에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시키고 항일 의병운동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단식으로 투쟁하다 세상을 떠났다.

 

 □ 3·1운동

 한강이남 최초의 3·1독립만세운동은 군산에서 시작되어 도내 전 지역으로 불길처럼 번졌다. 13만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100명이 넘게 사망하였으며 400여 명의 실종과 900명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문용기 열사의 항쟁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만세운동 중에 일경의 칼에 오른 팔이 잘리자 왼팔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 운동을 했다. 왼팔 마저도 잘리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순구하셨다.

 정읍은 임실과 더불어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임실에는 호남 최대 규모의 의병을 이끈 전해산이 있으며 애국지사 이석용이 있다. 전해산은 이석용의 ‘창의동맹단’ 참모이다. 이석용 부대가 남원 사촌 전투에서 타격을 입자 ‘대동창의단’을 결성하여 전남북 지방의 의병 부대를 규합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총지휘 했다. 진안 마이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임실에서 500명의 의병이 모집되자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아 ‘의병창의동맹’을 결성하여 왜적과 수많은 전투를 했다.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임실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채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고창엔 최초의 의병인 정시해와 3·1운동의 대표적 인물 김승옥이 있다. 정시해는 면암 최익현의 문인으로 왜병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나 진위대의 탄환에 맞아 순국했다. 민족의식의 계몽가 김승옥은 고창청년회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고 독립운동자금을 관리했으며, 민족의식을 키우는데 헌신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겪은 고초는 책과 씨름하는 이 시대 청년들이 어찌 상상이나 할 수나 있겠는가.

 전국에서 무장무장 확산되는 의병 때문에 일제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결국 1909년 호남의병대토벌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1910년 강제 한일병탄이 체결되고, 1919년 3·1만세운동이 있기까지 의병들은 산 속 깊이 들어가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의병은 1895년부터 1915년 전후까지 20여 년 동안 무장투쟁을 전개했으며 전북은 동학농민혁명의 영향으로 1907년 병오창의(최익현 임병찬)를 시작으로 후기 의병전쟁을 전국에서 가장 활발히 하였다. 호남평야를 지닌 우리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광활한 평야라는 지역적 특성으로 의병에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는 특징이 있으며, 전주 완주 익산 김제 출신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밝혀진 의병은 적으나 타 지역의 의진에 합류한 경우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 독립유공자

 전북 지역 독립운동유공자는 1,018명으로 추산되나 그 당시 가명으로 활동하여 드러나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수없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름 없이 묻힌 원혼이 얼마나 많으랴. 독립유공자는 임실이 141명으로 가장 많으며 정읍 순창 고창 군산 남원 순으로 이어진다. 전북 지역 독립운동 주요 시설은 고창에 정시해 선생 기념관, 정읍의 백정기 의사 기념관, 정읍시 칠보면 무성서원, 임실군 성수면에 소충사가 있으며, 진안군 마령면에는 이산의 묘가 있다. 장수군에 정인승 선생 기념관과 전해산 기념관이 있다. 군산 또한 ‘항일항쟁의 역사도시’로서의 긍지를 되찾고, 3·5군산 독립만세운동과 그 당시 희생된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군산3·1운동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북의 혼을 모시고 있는 전북지역 독립운동추념탑은 전주시 덕진구 조경단로에 터를 잡아 1994년 준공되었다. 입구에는 희생된 많은 사람을 상징하듯 무덤만큼이나 큰 태극기 더미가 양 옆으로 두 더미 꽂혀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붉디붉게 펄럭였다. 충혼탑으로 올라가기 전 조금 아래에는 항일, 독립정신의 혼이 지키고 있는 충혼각이 있다. 충혼각에는 영정 192위와 위패 776위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 서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 충혼탑은 21m의 높이인데 하늘과 통하고 있다. 정면 하단 양 옆으로 아래와 같은 글이 쓰여 있어 더듬더듬 읽어본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지금의 이 나라, 이 민족은 이곳에 모셔진 영령들의 피가 뿌려진 터전 위에 서 있음에 고개 숙여 감사하고 감사하다.

 송 희(시인, 전북시인협회 회장 역임, 전북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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