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어디를 더 믿는가”
“한국과 일본, 어디를 더 믿는가”
  • 김창곤
  • 승인 2019.12.10 1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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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겨울 가고시마는 쾌적하고 따뜻했다. 시 남쪽에 빌딩이 몇 채 들어섰으나 스카이라인은 거의 그대로다. 24년 전 필자가 살던 동네는 진입로가 확장되고 재래 상점들이 사라졌을 뿐이다. 차분한 골목에 간간히 노인들이 오가고 승용차가 들락였다. 필자는 30대 중반 기자로 인구 60만의 이곳에서 꼭 1년 ‘일본 연수’를 했다.

 “요갓다(다행이다)!” 일본 지인들은 지소미아 종료 유예에 안도했다. 필자는 이곳 작은 세미나에서 약 1시간 발표했고 질문도 받았다. 양국 관계가 벼랑에 몰리기까지의 곡절을 참석자들은 자세히 짚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조국사태, 교착된 남북관계까지 날마다 보도됐다.

 가까운 지인들과의 대화는 만찬으로 이어졌다. 지소미아 파국 모면에 자화자찬하는 한-일 정부 중 어디를 더 믿을 수 있느냐에서 화제가 멈췄다. 일본 정부가 ‘퍼펙트 게임’이었다고 하자 한국은 ‘포용 외교의 판정승’이라고 맞섰었다. 대법원 징용공 배상 판결 후속 대책으로 일본이 중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으나 한국은 불응했다. 일본은 “한국이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다가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에서 배제했다. 한국은 “일본이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며 이를 경제 침략으로 규정했다. ‘이순신 배 열두 척’과 죽창가로 맞섰다.

 문재인 정부는 여러 일로 도덕적 정당성이 훼손됐다. 조국 장관을 비호하며 사실을 왜곡하고 검찰을 압박했다. 지소미아 파기를 선언하면서도 ‘미국이 이해했다’고 거짓말했다. “북한과 평화 경제에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던 8.15 대통령 경축사를 놓고 북한은 “삶은 소 대가리도 앙천대소할 노릇”이라고 조롱했다.

 정권과 이해를 함께 해온 운동권은 지배계급이 됐다. 시민사회도 국가 권력에 의해 동원돼 그 지지기반 창출을 보조하고 있다는 ‘진보 원로 교수’ 발언이 9일 나왔다. ‘한-일 중 어디를 더 믿느냐’는 질문은 지소미아 연장 며칠 뒤 청와대 간부가 기자들에게 던졌었다. 일본 지인의 같은 물음에 필자는 ‘한국을 믿는다’고 답할 수 없었다.

 ‘조선인을 내쫓자‘고 시위하는 일본 극우는 극소수다. 일본 지인들은 한국의 일본 보이콧을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한국이 북한·중국·러시아 전체주의에 맞서 끝까지 자유 시장경제를 지키는 동반이 돼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선출된 독재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합법을 내걸고 선동의 언어로 자유와 인권, 번영과 행복이라는 보편 가치를 무너뜨려왔다. 한국 좌·우익 기회주의자들도 정의를 기치로 사실을 외면하며 민족 감정을 부추겨왔다.

 24년 전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GNI) 1만달러를 돌파했다. 일본은 그 해 4만달러를 넘겼다. 일본 밤거리는 젊은이로 넘쳤다. 그때 일본의 불황 터널 입구가 ‘잃어버린 20년’으로 이어지리라 누구도 예상 못했다. 한국은 작년 1인당 GNI 3만달러를 넘었으나 곳곳에서 경제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20여년 한국은 진보-보수-진보로 정권이 격하게 교체됐다. 일본도 전후(戰後) 처음 이념과 정당의 이합집산을 겪었다. 거짓 지식인들이 ‘민족주의’를 최고 반열의 가치로 내걸고 사라진 과거와의 전쟁을 부추겼다. 이들은 ‘역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유혹하며 반일-혐한(嫌韓)의 저주를 키웠다. 역사를 잊은 민족도, 역사에만 매달리는 민족도 미래는 없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마지막 빙하가 물러간 1만2000년 전까지 붙어 있었다. 일본인 뿌리인 ‘야요이인’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베스트셀러인 ‘총, 균, 쇠’ 2003년판에 논문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실었다. 논문은 이렇게 끝맺는다. “아랍인과 유대인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눴으면서 오랜 시간 서로 적의를 키워왔다.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 동아시아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김창곤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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