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바람, 선미촌에 불다.
예술 바람, 선미촌에 불다.
  • 박인선
  • 승인 2019.12.0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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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 작품(정크아트) 황소 /박인선 作

 1976년 1월, 난생처음 전주에 입성하는 때였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남노송동으로 가는 길을 물어 걸어갔다. 아마도 차비를 아끼고 싶었는지 모른다. 길목에 한옥으로 지어진 옛 전주역사 앞을 지났다. 지금은 전주시청 자리에 위치한 전주역사를 보니 한국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도시의 모습에 설렘을 느끼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시절 가끔씩 역전을 둘러보는 느낌은 색다른 재미였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도시 맛을 보는 순간이다. 아니, 그때까지도 기차를 타 본 기억조차 없었으니 대단한 볼거리였다. 역전을 중심으로 몰려드는 인파들은 진풍경이었다. 철길 너머에 자리한 선미촌은 우범지역이라 가면 안 된다는 집주인 아저씨의 당부를 생각하면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뚝 넘어’로 익숙한 선미촌은 한동안 미지의 세계로 남았던 곳이다.

 뚝 넘어는 철길 넘어 선미촌의 다른 이름이다. 흔히 말하는 성을 사고파는 성매매의 집결지였다. 전통문화의 도시의 얼굴에 깊게 파인 주름살이나 마찬가지다. 애물단지 같은 선미촌의 역사는 전주의 근현대사의 한 부분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에도 그들은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삶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도 그들과의 간격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난 후 철길이 외곽지역으로 옮겨졌다. 특별한 사회적 합의도 없던 시절이라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알기도 힘든 시기였다. 생각해보면 옛 전주역 건물을 보존하고 광장을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역 건물이 뜯긴 자리에는 전주시청이 들어섰다. 선미촌은 또 다른 보호막을 얻은 모습이다. 예단할 수는 없지만, 시청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선미촌의 모습도 존재할 수 있었을까.

 턱밑의 선미촌, 행정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더니만 색다른 아이디어가 동원이 되었다. 바로 예술의 힘이었다. 처음 시도는 그저 들려오는 공염불 같았지만 어느새부턴가 조금씩 소리 소문 없이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공적 예산이 투여되고부터 속도감도 느껴졌다. 젊은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더니 음침했던 거리가 점점 생기를 찾고 있다.

 일방주의적으로 해결하려던 과거와 달리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으니 원주민들도 이제는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적극적으로 나선 모양이다.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 모두의 보이지 않는 노력들이 함께한 결과라 하겠다. 예술교육도시를 표방한 노력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시행하고 있는 예술공간 거점들이 조금씩 들어서면서 희망적인 모습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좋은 예로 ‘서학동 예술마을’과 ‘팔복 예술공장’은 조금씩 원동력이 되어가고 있다. 선미촌에 들어설 ‘새활용 자원센터’는 자원 활용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모든 시민이 참여하도록 폐자원 활용에 대한 공모전을 공고(http://www.jeonju.go.kr)했다. 정크아트를 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도 매우 고무적이다. 학생들과 많은 시민들의 참여가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킬 대목이다. 더욱이 그 위치가 선미촌의 길목에 들어서게 되어 활성화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시골 출신의 작가는 청년기 이후를 전주에서 보내면서 전주의 역사를 지켜보았다. 이제 예술교육도시를 지향하는 전주가 확실하게 변화의 모멘텀을 다지고 있다. 전통을 계승하고 문화예술이 발전하는 지역에서 삶은 그 자체로 자존감이다. 선미촌에 예술의 바람이 불 줄 꿈이나 꾸었겠는가. 낙숫물에 바위가 뚫리듯이 변화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주인공이다.

  

 글 = 박인선(정크아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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