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3)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3)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06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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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의·승병 1만 日군에 자살攻擊... 정룔헌 옥쇄(玉碎)
조헌과 영규 2 - 금산 7백의총

조헌(趙憲)의 청주성 소복전때 관군은 싸움을 피하기만 했고 의병군의 전공을 시샘하기만 했다.

 조헌이 분개한 나머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방어사 이옥(李沃) 이하 장령들이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진격하지 않아 錦山전투때의 高敬命과 같이 될뻔했다"며 이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문책을 요구했으나 조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청주성 수복후 조헌은 군량이 모자라 다시 모이기로 하고 의병군을 해산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의병군 1천여명을 다시 모아 근왕(勤王)을 위해 온양(溫陽)까지 진출했다.

 윤선각이 당황했다. 조헌이 근왕을 하게되면 청주성 전투때의 관군의 태만이 들통나는 판이었다. 조헌 휘하의 장덕익(張德益)을 불러 "금산의 적부터 쳐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충청도))를 보전한 뒤 근왕을 해도 늦지 않다"며 관군과 합동작전으로 금산성 2차 공격을 제의했다.

 장덕익이 조헌에 전했고, 조헌이 동의하고 公州로 군사를 돌려 금산으로 향했다.

 조헌의 제1차 금산성전투때 부자가 순국한 고경명과의 약속을 못내 잊지 못했다. 근산을 먼저 치자느데 쉽게 동의한 것도 이 때문이기도 했다. 고경명은 금산공격에 앞서 조헌에 글을 보내 함께 형강(荊江:징징江이라고 하며 중국 양자강 중류 호북성에서 호남성 위의 악양까지를 말한다. 금강을 비유한 호칭)을 건너 금산을 치자고 했고 조헌이 응낙했는데 미처 거병도 하기 전에 전투가 벌어져 고경명이 전사했다. 이것이 조헌의 가슴에 통한(痛恨)으로 남았던 것이다.

 청주성을 치러 가다 ’형강’을 건너면서 먼저 간 고경명을 추모하는 깊은 심회를 시에 담았다.

 ’비휴(표범)처럼 날쌘 동녘땅의 백반 용병들이
  어찌하여 이 간난(艱難)의 위기를 구하지 못하는고.
  형강을 함께 건너자 한 그대는 어디로 가고
  이제 내 홀로 건너는데 차가운 바람만이 노(櫓)를 치는구나.

 관군과 의병군 사이는 기병(起兵)때 총지휘자가 현직 관료냐 전직 관료냐의 차이뿐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모병과 전공 다툼 그리고 합동작전때 지휘권 문제 등으로 알력이 없지 않았다. 경상도 감사 金수는 도망만 다니면서도 곽재우에 온갖 모함과 압력을 가했었고, 충청도 감사 윤선학도 조헌과 갈등이 많았다.

 윤선각은 조헌으로 하여금 근왕을 포기하고 금산으로 달려가게 한뒤 합동작전은 커녕 조헌 의병군에 가담한 장정들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각 읍에 공문을 보내 협력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바람에 1천여 의병중 현지에 도착한 의병은 7백여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온양현감 양응춘(楊應春)은 조헌군에 가담했다.

 조헌은 公州에서 권율(權慄)에 글을 보내 8월17일 금산성을 공격한다고 말하고 응원을 요청했다. 권율은 합동작전에 동의하나 기일은 연기하자고 회신 했으나 회신은 그가 죽은뒤 이틀후에 도착했다.

 조헌 의병군은 15일 공주를 출발하여 16일 유성(儒城)에 도착, 영규(靈圭)의 승군과 합세하여 17일 금산성 밖 십리 되는 연곤평(延昆坪)에 도착하고 진을 쳤다. 병력은 모두 1천3백여명이었다.

 금산성에는 일본군 6번대 소조천강경(小早川降景))의 1만병력이 지키고 있었다. 고경명 의병군의 배후 기습으로 웅치와 이치에서 선전하는 조선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채 全州城 공략을 포기하고 돌아왔으나 그뒤 금산쪽으로 북진하려던 전라도 보성(寶城)군과 남평현(南平縣:화순군 남평면)의 관군을 덮쳐 남평현감 한순(韓諄)을 전사시키는 등 군세는 여전했다.

 조헌이 권율 등 관군 응원에 대한 확실한 답도 없이 1천여 소규모 의병군으로 1만병력이 지키고 있는 금산성을 치려한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자살 공격이나 다름없는 무모한 군사작전이었다.

 그러나 조헌은 단호했다. 忠과 義만을 알고 대쪽 같은 성품의 그는 물러나 뒷날을 기약하자는 주변의 만류에 "임금이 욕되게 되면(주욕主辱) 신하는 죽어야 한다(신사臣死)"라며 단호한 결의를 보였다. 이에 감동한 영규와 의병군 전원이 옥쇄를 각오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6월3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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