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 윤봉길 의사
이달의 독립운동가 : 윤봉길 의사
  • .
  • 승인 2019.12.04 17: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고 『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하여 한글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1929년에는 월진회를 설립하여 농촌개혁을 실시하였다.

의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그 이후 중국 상해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한다.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다.

4월 29일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경계가 삼엄한 가운데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白川)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野村) 중장, 우에다(植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 상해총영사 무라이(村井)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의사는 수통형 폭탄을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 의거는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피체된 윤봉길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1932년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으며,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제공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