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뺄 것이 없는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 장상록
  • 승인 2019.12.03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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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기간 잊고 있던 친구를 뉴스 검색을 통해 만났다. 기사에 나온 그의 연구소로 전화를 했다.

 친구였다. 그런데 내 이름을 밝히니 어색한 반응이 돌아온다. 그렇게 얼마간 통화를 하고 끝났다.

  어쩌면 그것이 그 친구와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계속 뺄셈만 하고 있다. 내일은 또 누굴 빼야할 까. 그것은 어쩌면 소통을 얘기하면서 정작 존재하는 것은 일방적인 강요만 가득한 페이스북에서 내가 떠나던 순간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완벽함은 분명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상태다. 내게 완벽함은 앞으로 얼마나 더 뺄셈을 요구할까.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황지우 시인의 시 <길>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 지나가 만들어진 그 위를 오간다. 그리고 그 궤적을 길이라 말한다. 내가 걷고 있는 궤적은 진정 누군가의 길이 될 수 있을까. 개인만이 대상은 아니다. 내가 그렇듯 대한민국도 앞서 간 나라들의 궤적을 따라 오늘의 위치까지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줄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다.

  토드 부크홀츠는 <다시, 국가를 생각하다>에서 국가 쇠망 징조를 다섯 가지로 얘기하고 있다.

  저출산, 무역 증대, 부채 증가, 근로의지 쇠퇴 그리고 다문화로 인한 공동체성의 소멸.

  그가 근거로 제시 한 것은 제국 몰락사였지만 현재 대한민국 현실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것을 비판 없이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는 거울은 될 수 있다.

 한때 외국 사례를 인용하며 가르침을 강요하던 때가 있었다. 한 해 3천만 명이 외국을 다녀오는 한국인에게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지구상 인류가 다녀온 거의 모든 길을 한국인 누군가는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다녀온 길에 대한 기억이 아니다. 지구상 그 어떤 나라도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들어야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 유일의 0점대 출생률은 기적의 종말과 함께 미래세대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될 것이다.

 어쩌면 훗날 이 땅의 주인은 더 이상 단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원주민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현명하다면 결혼생활의 불편함, 출산이라는 위험천만한 노고, 양육의 번거로움과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누가 결혼할 것인가?”

  그렇다. 에라스무스의 말처럼 한국인은 너무도 현명하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바로 그런 이유로 사라질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유념할 것은 인류가 지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때로 미련함을 기꺼이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을 희생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현실이 아닌 이상을 따른 것이 어찌 현명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인은 언제까지 현명함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성리학은 송의 주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궁극적인 적용은 조선에서 이뤄졌다.

 같은 방식의 추론을 통해 민주주의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일지 모르지만 그 궁극에는 대한민국이 존재하리라 믿는다. 성리학이 처음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개혁을 위한 궁극적 방법론으로서였다.

  자신 편에 선 사람의 수가 많으면 그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생각의 합리성(?)에 대한 우려는 노파심일 것이다. 다만, 내 어리석은 생각의 한 조각을 감히 말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명함의 절정이 아니라 에라스무스가 던진 우신(愚神)의 말이다.

  “사람들은 거짓에 속는 것이 불행한 일이라 하지만, 실은 거짓에 속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불행이다. 인간 행복이 사태의 진상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엄청난 착각이다. 행복은 허상에 달렸다.”

  내게 계속되는 뺄셈의 기억과 진행의 출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한 진상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존재를 확인한다면 비록 하나일지라도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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