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0)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0)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3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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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 우도 권응수 영천城·충청도 조헌 청주城 수복
권응수 장군 영정 / 사진=한국명인초상대감
권응수 장군 영정 / 사진=한국명인초상대감

낙동강 서쪽지역 경상우도 수복전에 응원 출동한 전라우도 의병장 삼계 최경회(三溪 崔慶會1532~1593)는 화순(和順)에서 기병하여 고경명 휘하 의병군으로 錦山전투에 참전했다가 고경명이 전산한 뒤 和順출신 의병들의 추대로 의병장이 되어 남원 장수 무주 등지서 활동하다가 경상도로 넘어갔었다. 그의 나이 61세였으며 녕해(寧海)군수를 지낸바 있다. 경상도에서 줄곧 활동하다가 다음해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되어 이해 6월 2차 진주성전투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가 순국한 뒤 8월에 둘째형 경장(慶長)이 일어나 의병장이 되었고 1597년 정유년(丁酉年) 2차전쟁대는 큰형 慶雲이 일어나 화순집 뒷산 조성산맥(鳥城山脈)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3형제 의병장으로 2형제가 순국했다.

 최경회 의병장의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그와함께 경상도로 건너가 3차 성주성전투때 전공을 세워 경상도 사천(泗川)현감이 된 장윤(張潤 1552~1593)은 승평(昇平·順川)에서 기병했다.

 전라좌도 의병장으로 보성(寶城)에서 기병한 삼도 임계영(三島 任啓英 1528~1597) 또한 이해 나이 65세로 보성현감을 지낸바 있고 최경회와 함께 남원 장수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경상도로 넘어가 제3차 성주성전투에 참전한뒤 줄곧 경상도에서 유격전을 벌였고 뒤에 양주 완주 해주 목사를 지냈다.

 전라도 의병장으로 나주(羅州)서 기병한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 1537~1599)은 이해 나이 56세로 任實현감을 지낸바 있으며 경상도로 출동하지 않고 근왕을 위해 북상, 수원의 왜성산맥에 진을 치고 유격전을 벌이다가 江華로 진을 옮겨 주로 피난조저오가 전라도 사이의 연락임무를 맡는다. 조정에서 판결사(判決事)로 임명되고 창의사(倡義使) 칭호를 받은 그는 한성에 결사대를 투입하여 군자금 모금과 적정에 대한 정보수집 등 비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다음해 1593년 4월 퇴각하는 일본군 뒤를 쫓아 경상도까지 진출, 2차 진주성(晋州城)전투에서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진주성 2차전은 전라도 의병군들의 옥쇄전(玉碎戰)이었다.

 경상우도에서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 역사상 그 이름이 길이 빛나고 있는 의병장들이 일찍부터 의병을 일으키고 전라도 의병들까지 불러들여 주로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격전과 읍성 탈환전을 벌인데 비해 낙동강 동쪽 경상좌도의 의병군 봉기는 7월에 들어서야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도 의병군이 일어선 것은 초론사(招論使) 김성일이 훈련원 봉사(奉事)를 지낸 권응수(權應銖)로 의병대장을 삼아 좌도 의병을 총괄지휘하도록 한뒤 부터였다.

 백운제(白蕓齊) 권응수는 1546년(명종 원년) 신녕현 추곡(현 영천군 화산면 가상동)에서 태어나 39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전쟁때 나이 46세로 경상좌수영의 평범한 장수였다.

 권응수가 의병을 일으키자 추곡마을 일대 안동 권(安東 權)씨 문중의 28인이 의병으로 참여했고 하양 청송 의흥 등 여러 읍의 장정들이 모여들었으며 군수 김윤국(金潤國)도 군사를 이끌고 와 참여했다. 김윤국은 일본군 2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군이 4월22일 영천을 덮칠때 성을 비워놓고 경주로 달려가 태조의 쉬용만을 들고 산속으로 숨어들어갔던 인물이다. 의병에 관한 기록으로는 드물게 이때 모인 병력이 정확하게 3,560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권응수는 김윤국을 별장으로, 정대임(鄭大任) 정세아(鄭世雅) 신해(申海) 등을 의병장으로 하여 永川城의 일본군을 치기로 했다. 그무렵 일본군은 영천성을 중심으로 신영 의흥 의성 안동일대에 분산 주둔하고 있었다.

 7월초 진용을 갖춘 권응수 의병군은 훈련을 쌓고 군기를 바로 세운뒤 14일 박연(朴淵·현 화산면 석촌동)에서, 22일 소계(召溪)와 沙川에서 소규모 적군과 조우, 실전경험을 쌓으면서 영천성에 접근하여 24일 추평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2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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