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1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20.01.0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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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佛徒)들 일어나 의승군 조직

 공격군을 우습게 보았던지 성문을 열고 일단의 적군이 쏟아져 나왔다. 한참 무더운 여름날이어서인지 일본인 특유의 훈도시(국부만 가리는 수건 비슷한 것) 차림의 반 나체에 일본도를 휘둘렀다.

 일제히 활을 쏘아 적을 죽인뒤 백병전이 붙었다. 승군들의 도끼와 조선낫이 뜻밖에 위력을 발휘했다. ’ㄱ자’로 꺾여진 조선낫은 적군을 찍거나 목을 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조·일전쟁중 봉기한 승군의 주무기는 도끼와 낫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산속 절에서 나무와 풀을 베던 익숙한 솜씨로 적과 싸웠다.

 날씨탓으로 의병군들 가운데서도 저고리를 벗어던지고 바지만 뀌어찬채 싸우는 의병들이 많았다.

 조헌이 "가죽 갑옷위에 옷을 입어라"하고 소리치자 의병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목숨을 건 전장에서도 여유가 있었다.

 적군이 마침내 성안으로 쫓겨 들어가자 뒤따라 공격군들이 장제(長梯:긴사다리)와 승제(繩梯:새끼줄로 엮은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고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럴때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번개와 천둥이 울리며 소낙비가 폭우로 쏟아졌다. 공격지휘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헌이 장탄식을 하며 "승패는 역시 하늘의 뜻"이라며 꽹과리를 울려 군사를 물렸다.

 그러나 이날 밤, 청주성의 일본구는 더이상 조선군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전사자 시체를 불태우고 밤사이 성을 버리고 퇴각해 버렷다.

 다음날 아침 조헌 의병군은 청주성에 입성했다.

 청주성을 잃으면서 일본군은 3번대 흑전장정(흑전장정)이 북상했던 경상도 금산(金泉)~추푸령~영동~청주~용인을 잇는 보급로를 잃었다.

 조선의 불교는 호국불교(護國佛敎)로서의 전통이 있었다. 평소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아 중생을 구제코자 머리를 깎고 산속에 들어가 수도를 하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목탁 대신 칼을 들고 일어나 구국전선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호국불교 정신은 삼국시대이래 계승되어 왔다.

 645년 高句麗 보장왕(寶藏王) 4년부터 5년간 唐太宗의 전후 세차례에 걸친 침공때에 승병 3만명이 참전한바 있었으며 高麗시대에도 사원마다 수원승도(隨院僧徒)라 하여 평시에는 수도외에 노역 등에 종사하다가 국란에 처하면 승병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크게 번창했던 시기였다. 조선왕조에 들어서는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에 따라 불교승들이 거의 천민이나 다름없었는데도 호국불교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일본군이 국토를 유린하자 전국 사찰에서 승병들이 일어났다.

 조선왕조 시대에도 僧軍제도는 그대로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이순신의 난중일기(임진년 3월2일)에 ’승군 백명이 돌을 주워 날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전라좌수영 관할의 흥덕사(興德寺:현 나주시 중흥동)는 의병주진사(義僧駐鎭寺)로 삼혜(三惠) 의능(義能) 등의 승장지휘아래 약 4백여명의 승군이 조직되어 경계, 군량미 조달, 축성, 무기제조, 전함건조와 수리 특히 종이제조 등의 軍役에 종사했을 뿐아니라 군사작전에 직접 참가 유격대 돌격대로도 크게 활약했다.

 승군조직은 전쟁후에도 3백년을 그대로 지속하다가 1894년 신우갱장(申牛更張)때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사라졌다.

 8월1일 청주성 수복전에 조헌의병군과 함께 기허 영규(騎虛 靈圭)의 의승군 1천여명이 참전한뒤 이들은 다시 금산성 2차 공격전에 참전하여 승장 영규가 전사했다.

 영규는 공주 청연암(靑連庵)에서 승병을 일으켰다.

 부휴선수(浮休善修)와 그의 제자 벽암 각성(碧岩 覺性)의 의승군은 진주성전투 등 경상도에서 활약했으며 뇌묵 처영(雷默 處英)은 남해 대흥사에서 2천여 승병을 이끌고 권율과 함께 북상하여 평양, 개성, 경상도 의령으로 전전한뒤 남원의 문룡산성(蚊龍山城)을 수축했다.

 가장 대표적인 의승군 활동은 역사상 그 이름이 길이 빛나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 1520~1640)과 그의 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1544~1610)의 의승군이었다. 휴정은 전쟁때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 있다가 선조의 명령을 받아 조선의 승군 총사령관격인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군 1,500명을 일으켰고, 유정은 휴정의 명으로 건봉사(乾鳳寺:강원도 고성군 거진면 영천리)에서 승병 700명을 일으켜 스승 휴정과 함께 이여송(李如松)의 평양성 공격전에 참여했다.

 특히 유정은 일본군과의 네차례 강화회담과 전쟁이 끝난뒤 1604년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새 집권자인 덕천가강(德川家康도꾸가와 이에야스)과의 담판으로 포로로 잡혀간 조선 백성 3천여 명을 데리고 귀국함으로써 외교활동에 발군의 공을 세웠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27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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