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8)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8)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25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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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알았으나 내몸 몰랐네" 김면 장부(丈夫) 한 남겨
김시민장군 영정 / 충민사 제공
김시민장군 영정 / 충민사 제공

김면의병군은 이에 앞서 무계부근 낙동강에서 일본군 수송선 2척을 들이쳐 빼앗았는데 그 배안에는 뜻밖에 한성 왕궁의 궁중보물이 실려 있었다. 金誠一은 이를 南原까지 옮겨 보관시킨바 있었다.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했듯이 거창현과 안음현내 모든 백성들의 식량 등을 모두 김면의 통제를 받게하여 군량걱정 없이 싸울수 있게 했고, 만호 황응남(萬戶 黃應男), 판관 이형(判官 李亨) 등 현직 무장을 그에게 배치해 주었다.

 적의 선두가 고개마루에 이르고 부대의 대부분이 포위망안에 들어왔을때 김면의 사격명령이 떨어지고 삼면의 숲속에서 화살이 쏟아져 날았다. 순식간에 적의 대열이 흩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기습을 당한 적군은 죽은자의 시체를 그대로 남긴채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거의 같은 시각에 소백산맥의 민주지산(珉周之山)과 덕유산(德裕山) 사이 고갯길로 茂朱에서 넘어온 적병 1천여명이 나타났다가 김면군에 쫓겨 그대로 달아났다.

 이날의 전투에서 판관 이형이 전사했다.

 이 싸움에는 거창일대에 사는 산척(山尺)들 수십명이 참전, 큰 전공을 올렸는데 山尺이란 산에서 약초를 캐고 사냥을 주업으로 하는 백성들이었다.

 우척현전투 승리이후 김면의병군은 대폭 강화됐다. 초논사(招論使) 김성일이 거창 함양 산청 합천군 지방 군사들을 모아주어 병력이 3천여 명에 이르렀고 전쟁초기 성을 버리고 도망쳐 거창에 와 있던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합류했으며 금산의병장 성균관 박사 여대노(呂大老)도 합세해 있었다. 여기에다가 牧使직무대행 중이던 진주팡관 김시민(金時敏)이 김면의 명망을 듣고 진주성은 비워둔채 군사 1천여명을 이끌고 와 있었다.

 김면의병군은 거창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8월3일 소조천융경의 6번대가 지예(知禮) 우천ㄱ현을 넘어 거창까지 쳐들어와 김면의병군과 사랑암(沙郞巖)에서 맞부딪쳤다.

 39세의 김시민은 용감했다. 김면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적진 속을 종횡으로 누비며 독전을 하고 적을 닥치는대로 베었다. 마침내 적군이 쫓겨 우척현 고개를 넘어 지례현까지 퇴각했다.

 이때 진주성의 방비가 허술한 것을 안 일본군이 창원과 진해에서 출병하여 사천을 거쳐 진양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고 김성일이 즉시 김시민을 복귀시키는 한편, 곤양(昆陽)군수 이광악(李光岳) 등으로 하여금 응원케 하고 자신도 직접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에는 김시민에 앞서 곽재우가 의병군을 이끌고 들어가 지키고 있었다.

 일본군이 진주성 촉석루앞까지 왔다가 南江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김시민·곽재우군이 성문을 열고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하자 적군이 쫓겨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대로 추격을 거듭하여 내친김에 사천 김해 고성까지 모두 수복했다.

 김시민은 從五品 判官에서 일약 正三品 牧使로 승진했다.

 의병장 김면은 기병후 한번도 갑옷을 벗은 일이 없이 큰 전투만 10여차례, 침입해온 적을 물리치기 30여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만석꾼의 가산은 탕진되고 처자가 유리걸식을 하는데도 이를 돌보지 않고 전장에서만 보냈다.

 김면(金沔)은 뒤이어 일본군 대군이 집결해 있던 성주성에 관군과의 연합으로 3차례나 줄기찬 공격을 편 끝에 이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전장의 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3월11일 금릉(金陵)군 하리(賀里)의 한 병영 막사에서 숨지면서 오직 나라만을 위하여 싸우다 죽어가는 대장부 최후의 통절한 심회를 여덟자의 유언으로 남겼다.

 "지금까지 나라가 있는줄을 알았지만 이 한몸이 있는줄은 몰랐네(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

 이 한몸 죽어가다보니 끝없는 나라사랑 위국충절을 다하지 못하는데 대한 여한이었을까. 아니면 나라만을 생각해 살다가 이 한몸 죽어지니 허무할 따름인 한 인간으로서의 회한이었을까.

 8월21일 김면의병군은 정인홍의병군과 성주성 공격전에 참가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2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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