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9)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9)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27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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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보급 외길 陸路의존 의병 출몰에 전전긍긍

그 무렵 성주성에는 일본군 대군이 집결해 있었다.

 곽재우와 김면에 쫓긴 일본군 대부분이 성주로 몰려들었다.

 성주성 자체는 우시수승(羽柴秀勝) 9번대가 지키고 있다가 8월11일자로 모이휘원(毛利輝元) 7번대 부장 계원강(桂元綱·가추라 모도추나) 1만명력과 교대했다.

 김성일이 김면 정인홍 등의 의병군에 성주를 치도록 하는 한편 때마침 도례제사(都禮祭使)가 되어 전라도에 내려와 있던 정철(鄭澈)에 응원을 요청, 雲峰현감 남간(南侃), 구례(求禮)현감 李春元의 관군 5천명의 지원을 받았다. 때맞춰 和順에서 기병한 최경회(崔慶會)의병군과 행동을 같이한 임계영(任啓英)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적군과 대치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성주와 개령(開寧)방면으로 철수하는 바람에 뒤를 따라 소백산맥을 넘어와 거창에서 합류했다. 조선군 군세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관군과 의병군은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에서 작전회의를 가진뒤 고령으로 진출, 성주성을 남쪽으로부터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날 하오 4시쯤, 조선군이 성을 에워싸고 공격도 하기 전에 일본군 응원군이 도착, 포위군의 뒷걸미를 덮쳤다. 조선군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한 모리휘원이 부장 길견원뢰(吉見元賴·요시미 모도요리)부대로 하여금 긴급 구원에 나서도록 했던 것이다.

 관군과 의병군 사이에 지휘계통과 연락망도 서 있지 않은데다가 포위진형을 짜기도 전의 갑작스런 상황변화에 당황한 조선군이 그대로 무너지고 흩어져 각기 자기들의 본진으로 퇴각, 제1차 성주성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차 성주성 공격은 9월11일에 감행됐다.

 그무렵 이미 조선군에 몰리기 시작한 일본군은 성안에 틀어박혀 좀처럼 밖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1차공격에 실패한 김면 정인홍이 합천군수 배설(裵楔)과 전 巨濟현령으로는 합천가장(陜川假將:임시발령직)인 김준민을 설득하여 초논사(招論使)에서 우도감사(右道監司)로 발령된 김성일에 보고도 없이 성주성 공격에 나섰다. 성주성 5리 바께 가평(可坪)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10일 하루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은 성안에서 조총으로 응사할 뿐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 김면이 배설을 불러 적의 원군이 올 것으로 예상되는 開寧 현쪽의 부상현(扶桑峴)에 복병을 배치해 두도록 했다. 그러나 배설은 자기 진영에 돌아가 "서생따위의 지시를 받아 심부름이나 하다니"하며 복병을 배치하지 않고 말았다.

 11일 아침 공성(攻城)자재인 운제(雲梯:구름사다리) 비루(飛樓:곧은 나무를 성보다 높에 얽어 만들고 그 위에서 활을 쏘게 한 전투용구) 형차(衡車:거목에 바퀴를 붙여 밀고 들어가 성문 등을 공격하는 전투용구) 등을 마련, 공격준비를 하고 있는데 부상현을 넘은 적의 응원군이 풍우처럼 달려왔고 때를 맞춰 성안의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와 포위군을 안팎에서 협공했다.

 조선군이 또다시 무너지고 2차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혼전중에 정인홍의 별장 손승의(孫勝義)가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3차 성주성 공격은 석달이 지난 12월7일부터 시작다.

 김면이 경상도의병 도대장(都大將) 정인홍이 경상도 의병장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두사람의 응원요청을 받은 전라도 右의병장 최경회의병군, 左의병장 임계영의병군이 장수와 무주에서 넘어와 각각 개령방면, 고령방면에서 활동중이었다. 김면 정인홍의병군과 서로 연락하여 성주의 일분 주둔군을 수시로 기습 공격했다.

 이때는 이미 권응주 조헌 영규(靈圭)의병군에 영천과 청주성이 박진(朴晉)관군에 경주성이 수복되어 있었고, 李舜臣함대가 일본군 조선침공 최대기지인 釜山까지 쳐들어가 뒤집어 놓은 뒤였다. 멀리 북쪽에서는 조·명군 연합군이 平壤을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7일 성주성에 도착한 경상·전라의병 연합군은 그로부터 14일까지 줄기차게 성을 공격했다. 이번 작전에서는 경상도 의병副將 장윤(張潤)이 개령의 적군 본진까지 진출하여 응원군의 출동을 견제했다. 장윤의병군이 응원차 출동하는 적군을 매복 기습, 2백여명을 몰살시키고 조선인 남자포로 4백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성안의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야전을 벌여 쌍방 2백여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14일 대규모 공격을 퍼부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의병 연합군쪽의 피해도 적지 않아 이날 철수했다.

 성주성안의 일본군은 꼼짝않고 있다가 이듬해 1593년 1월15일 밤 성문을 열고 개령으로 철수, 조선 의병군이 무혈 수복했으며 개령의 모이휘원 본군과 금산의 일본군도 모두 善山방면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지역이 모두 수복되었고 일본군은 낙동강 水運을 완전히 포기하고 부산진-밀양촌-청도군-대구촌-인동촌-선산촌을 잇는 외길 육로보급에 간신히 의존한채 의병출몰에 전전긍긍하는 처지로 몰렸다.

 경상도 의병군의 적 후방 보급로 차단및 위협이야말로 조선군의 최후 승리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20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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