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4)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16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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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중에도 朝鮮 역유(驛遊)제도 제대로 기능

조·일전쟁을 다시 보면서 그때의 민병 즉 의병전투도 재조명·재평가함으로써 다시 정리할 필요를 많은 부분에서 깨닫게 되었다.

 그간 의병들의 활동이 사실 이상으로 과장되고 의병장들이 전설적인 인물로까지 미화됨으로써 마치 ’임진왜란은 이순신과 거북선과 의병들 그리고 명나라 원군들’만이 치러낸 ’전란’이었고 ’조정과 관군은 도망만 다녔고,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던 존재’로 상대적인 매도가 되어있다.

 이같은 인식은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까지 3국이 개입되어 국제전으로 7년에 걸쳐 전개된 전쟁 전체를 조감할 때 매우 잘못된 것이며 왜곡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7년전쟁 기간중 의병전투는 첫해와 다음해 여름까지 1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일본군이 부산으로 퇴각하고 조선의 거의 전역이 수복된 1593년 여름 무렵에 의병은 소멸되었다. 적군의 퇴각으로 의병활동의 필요성도 사라졌거니와 조정이 의병활동을 억제, 해산시키거나 관군에 편입시켰다. 초기와는 달리 의병활동의 폐해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 기간이 사실상 조·일전쟁의 거의 대부분이라 할 만큼 중요한 기간이었고 이 기간중 의병활동은 눈부신 것이기도 했다.

 경상도 의병들의 지역방어, 보급선 차단, 전라도 진격 봉쇄 등의 유격전 활동은 전세를 뒤바꾸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고경명군 김천일군 충청도의 조헌·조규군 경상도의 권응주군 등은 금산·진주·청주·영천성 등의 공방전 및 탈환전을 통해 실질적으로 정규군의 전투임무를 수행하여 큰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병군이 조·일전쟁 전반을 주도했거나 전세를 결정지은 것은 아니었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조정과 관군이 주도했고 전세를 결정지었다.

 정쟁초기 관군은 패주를 거즙했고 조정은 황망한 피난길을 걸었다.

 그러나 기습 침공을 받은 국가의 정부와 정부군이 초기 전투에서 패주를 거즙하다가 침공군의 예봉이 둔화된 뒤 반격작전에 나서 침공군을 격퇴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사례는 세계사에 얼마든지 있다.

 1812년 프랑스 나폴레옹군의 침공을 받은 러시아가 모스크바를 버리고 퇴각했다가 반격에 나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전쟁, 세계1·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유러베 제국이 초기 패전을 극복하고 반격작전에서 독일제국을 굴복시킨 전쟁,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을 받아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에서 패주했던 미국이 반격에 나서 일본을 항복시킨 태평양전쟁, 가까이 조선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대산민국 정부와 국군이 낙동강 이남으로 패주했다가 국제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 휴전선까지 수복한 6.25전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문제는 개전초기의 패주에 있는게 아니라 퇴각하면서 얼마만큼 국가 기능과 질서를 유지, 침공군을 저지하는 한편 군대를 재편성, 반격전을 전개하고 최후 승리를 거두었느냐 못했느냐에 있다.

 조선의 조정과 관군은 그러한 최소한의 기능과 질서를 유지했다.

 부산과 동래성은 결사적인 수성전을 폈고, 조정은 상주, 충주, 한강 등에 저지선을 폈으며 수도를 버린뒤 피난조정이 우방 명나라에 청병(請兵)외교를 통해 원군을 끌어들이는 한편 임진강(臨津江), 대동강(大同江)에서 저지작전을 펴기도 했다.

 일본군의 침공은 진격로를 따라 주요 읍성들을 차례로 점령한뒤 성의 규모나 중요성에 따라 일부 수비병력을 주둔시키고 전진하는 식이었다. 흡사 구슬을 꿰듯했다.

 구슬(읍성)과 구슬 사이는 매우 취약했으며 의병들이 일본군 이동로에 매복하고 있다가 치고 내빼면 꼼짝없이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점령지역 읍성의 밖은 일본 점령군의 힘이 거의 미치지 못했다. 그대로 조선조정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조선의 통신제도인 역유(驛遊)제도가 그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전국 538개 驛가운데 대부분이 살아서 움직였다. 신경조직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13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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