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18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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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의병군 낙동강유역서 맹위(猛威)
홍의장군 곽재우 기록화 / 전쟁기념관 제공
홍의장군 곽재우 기록화 / 전쟁기념관 제공

 피난조정과 전라도는 물론 경상도 등 적의 점령지역내 관군과 의병들 사이에 수시로 장계(狀啓)와 임금의 교지(敎旨)가 오고 가 조정의 통치가 사실상 조선 전역에 미치고 있었다. 백성들도 비록 평소 불만이 있었다 하더라도 함경도 등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임금과 조정에 충성스러웠다.

 일본군은 진공과정에서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 점령지 주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진격로 주변이 초토화 됐다.

 결국 점령지역 조선 백성들로 하여금 살기 위해서도 의병으로 봉기할 수밖에 없게 했으며 점령지역의 초토화로 인해 본국으로 부터 군수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때 현지조달도 불가능해졌다.

 적진 속에서 자승자박을 한 것이다.

 개전 초기 연전연패의 충격에서 깨어난 조선의 관군은 점차 전투력을 회복해 나갔다.

 조선의 수군이 남해 제해권을 장악한 것은 물론 權慄휘하의 전라도 육군이 이치와 웅치전 사수를 통해 곡창 전라도를 지켰고, 개전초 내빼기 대장이었던 박보(朴普)의 경상도 육군이 적의 점령아래 있는 경주를 수복했으며 김시민(金時敏)군이 요충 진주성(晉州城)을 사수했다. 조·명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한뒤 권율의 전라도군이 행주(幸州)에서 대승, 일본군을 수도 한성에서 몰아냈다.

 정유년(丁酉年) 2차전쟁때는 의병의 역할이 없는 관군과 명군만의 결전이었다.

 의병전투가 전세를 반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이를 과대평가하고 조정과 관군이 초전 패주를 극복하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도 이를 과소평가하고 있는것은 역사의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조·일전쟁때의 의병전투는 이같은 시각에서 재조명되어야 한다.

 의병전투 가운데 가장 주목되고 대표적인 것은 곽재우(郭再祐) 경상도 의병들의 전투다.

 곽재우는 1552년(명종 7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의 아들로 경상도 의령현(宜寧)군 유곡(柳谷)면 세간리(世干里)에서 태어나 34세때 과거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답안지 내용이 당시 선조의 평소 뜻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호를 망우당(忘憂堂)이라하고 그뒤 그는 그대로 초야에 묻혀 있다가 41세가 되는 해 전쟁을 만나 열흘만인 24일 가솔 5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가 살아온 의령은 낙동강(洛東江)과 南江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당시의 두 강은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하여 큰 짐을 실어나르는 배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水運의 요충지였다. 그는 평소 배를 타고 낚시를 다녀 이를 두 강의 지리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

 일본군은 처음의 계획대로 낙동강 하구 金海 七星浦에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싣고 강을 따라 북으로 영산, 창녕, 현풍, 고령, 성주, 외관, 구미, 금산(김천), 상주까지 내륙 깊숙이 오르내렸다. 서쪽으로는 南江으로 의령을 지나 진주까지 오고갈수가 있었다.

 곽재우는 오늘에서 보아도 감탄할만큼 유격전술에 능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악한 무기로 무장한 소수의 병력으로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다수의 적군 병력을 상대로 싸워 이기는 유격전술의 기본은 ’치고 내빼는’(hit and run) 기습과 도주의 기동전이다.

 곽재우는 의병들에 매복과 기습 그리고 재빠른 후퇴 등의 유격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낙동강변 요소 요소에 감시병을 배치, 강을 타고 오르내리는 일본군의 동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5월 어느날 수십척으로 편성된 일본군 수송선단이 강을 타고 유유히 내려오고 있었다. 곽재우는 기강주변 숲속에 의병들을 매복시켜 놓고 강여울에 수십개의 말뚝을 물속에 박아두었다. 기강은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이다. 누구보다도 곽재우는 이곳의 水勢를 잘 알고 있었다. 여울은 수심이 낮고 물이 급류로 흘러 조그만 장애물에 걸려도 배가 뒤집히기 마련이다. 여울에 이른 일본군 ㅂ ㅐ들이 말뚝에 배밑이 걸리면서 급류에 휩쓸려 뒤집히거나 오도가도 못했다.

 숲속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퍼부었다. 물속에 뛰어들어 적의 목을 벤 숫자만 60급이 넘었다. 첫 유격전투의 큰 승리였다.

 이때부터 의병들은 말로만 듣던 일본군들이 별게 아니라는 자신과 용기를 얻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13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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