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6)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의병전투 (6)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20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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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의병군 낙동강유역서 맹위(猛威)

낙동강에는 10여 군데의 여울이 있었다. 여울마다 곽재우 의병군들이 말뚝을 박아놓아 일본군 수송단의 배들이 걸핏하면 걸려 뒤집히고 의병들이 기습을 한뒤 내빼는 바람에 피해가 갈수록 늘어났고 점차 배를 이용한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불가능하게 되어갔다.

 의령(宜寧)읍의 정암진(鼎巖津)나루는 부산, 마산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요충지였다. 여기를 건너 산청, 함양을 지나 팔양치(八良峙)를 넘어 南原으로 가거나 육십령을 넘어 長水로 가게된다.

 6월 어느날 전라도 점령을 맡은 일본군 6번대 소조천봉(小早川峰) 景의 부장 안국사 혜경(安國寺 惠境)의 2천여 병력이 그간 주둔했던 창원을 출발하여 정암진 나루 건너편 함안땅에 저녁무렵에 도착했다.

 정암진은 강 가운데 솥뚜껑 같은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대는 늪지대가 많았다.

 일본군은 늪지대를 피해 마른길에 방향 표지를 해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강 준비를 했다.

 밤사이 곽재우는 군사를 시켜 방향표지를 늪지대로 돌려놓고 숲속 요소요소에 복병을 배치하는 한편 정암진 언덕숲속에도 복병을 배치해 두었다.

 곽재우는 전투때마다 붉은옷에 堂上官 三品 벼슬아치가 쓰는 갓을 쓰고(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깃발을 들고 다녀 일본군 사이에도 무서운 紅衣將軍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큰 전투가 벌어지면 그는 몸이 빠른 군사 10여명에 紅衣를 입혀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게 하여 흡사 곽재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일본군을 공포에 싸이게 했다.

 날이 밝아 日軍의 도강작전이 시작됐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간 日軍들은 허우적거리다 매복 대기중이던 곽재우 의병들의 화살세례를 받아 몰사 죽음을 당했고,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던 日軍 역시 정암진 언덕 숲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의 화살받이가 되고 말았다.

 정암진 도강 전투에서 곽재우 의병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일본군 6번대는 더이상 이길을 통한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곽재우 의병군의 연전 연승에 감탄한 경상우도 초론사(慶尙右道 招論使) 김성일(金誠一_이 의녕과 삼척 두 현의 군사를 모아 곽재우 지휘아래 넣어 1천명의 병력이 되었고 민가의 양곡도 곽재우의 통제를 받게 했다. 이때 전 목사(牧使) 吳운과 학론 박세제(學論 朴思齊)가 거느린 3천병력이 합세하여 곽재우 의병군은 4천 병력으로 군세가 늘어났다.

 곽재우 의병군의 손문이 퍼지면서 경상도 도처에서 크고 작은 의병군이 잇따라 일어났다.

 의병장 金면이 거창에서, 정인홍(鄭仁弘)이 합천(陜川)에서 단성(丹城)에서 권세춘(權世春)이 의병 5백명, 진주에서 허국주(許國柱)가 7백명을 모았고 개전초기 산속으로 도망쳤던 함안군수 유숭인이 산에서 내려와 흩어진 군사 6백명을 수습하여 임지로 들어갔으며 김치원(金致遠) 이대기(李大期) 등의 의병장들이 일어나 黃江의 적을 쫓아냈다.

 그무렵 낙동강 동쪽 현풍, 창녕, 영산 등지에는 일본군 제9번대 우시수승(羽柴秀勝)의 1만1천5백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낙동강을 오르내리는 수송선단 보호임무를 띠고 있었다.

 7월 어느날 간덩이가 커진 곽재우 의병군이 낙동강을 건너 현풍성(玄風城)을 공격했으나 적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밤에 일부 병력을 비판산(琵琶山)과 현풍성 뒷산으로 올려보내 횃불을 밝히고 성안에 포를 쏘아대니 밤사이 성을 버리고 창녕성으로 퇴각했다가 다시 영산성으로 후퇴했다. 두개의 성을 수복한 것이다.

 곽재우 의병군은 승세를 몰아 영산성에 달려 붙었다. 영산성에는 현풍과 창령성에서 퇴각한 일본군까지 합려서 대군이 몰려 있었다. 곽재우는 金誠一에 요청하여 의령 초계 고령 세군현의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3일간의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무계(茂溪)의 일본군도 김준민(金俊民)의병군에 기습을 당해 큰 타격을 입었고 마침내 영산성의 일본군이 더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성주성으로 퇴각했다.

 이로쏘 낙동강 남강유역의 慶尙右道 서부지역 대부분이 수복되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5월13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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