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전라도방어전 (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전라도방어전 (5)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2.04 00: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경명군 일본 배후급습 全州城협공 좌절시켜

 9일 하루 성밑까지 여러차례 적의 정찰병이 와 살폈으나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웅치를 넘어 퇴각했다.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웅치에 널려있는 조선군 전사자들의 시체를 모아 매장한뒤 표말을 세웠다.

 ’조선충신의사의 영혼을 조상하노라(조조선국 충간 의담(弔朝鮮國 忠肝 義膽)’

 그들에게는 비록 적군이었으나 방어군의 충성심과 용맹함에 감복했던 것이다.

 全州 침공군이 퇴각한 것은 전주성의 결전 태세가 결연했고 웅치 돌파전투에서 희생이 많았을뿐 아니라 같은날 이치전투에서 격퇴당하여 협공작전이 불가능해진데다가 이날 전진기지인 錦山城 자체가 고경명군에 전명적인 공격을 받기 시작한데 있었다. 금산성을 잃게되면 전주 침공군은 퇴로를 차단 당해 독안에 든 쥐꼴이 되는 판국이었다.

 고격명군은 9일 연산(連山)에서 진산(珍山)으로 진출하여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과 그 휘하 영암(靈岩)군수 김성헌(金成憲)이 거느린 관군과 합동으로 금산을 치기로 했다.

 소조천융경이 8일의 이치전투에서 병력이 적은 권율군을 끝까지 몰아붙여 돌파할수도 있었는데 하루 싸움끝에 황급히 퇴각하고 안국사 혜경이 전주성 공격을 단념한것은 고경명군이 금산쪽으로 이동중임을 알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들로서는 배후의 허를 찔리는 셈이었다. 고경명은 결과적으로 이치전과 웅치전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9일 성을 에워싸고 공격이 시작됐다. 성밖의 집들에 불을 질러 자욱한 연기로 아군의 행동을 가리고 화약을 다룰 줄 아는 병사 30명을 성 밑으로 접근시켜 성문 폭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금산성 전투에서도 조선군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가 사용되었다. 대완구로 진천뢰를 쏘아 성안에서 폭발시켰다. 성안의 창고 가옥들이 폭파되고 불탔다. 연이어 진천뢰를 날려 보냈다. 성안에서 사람과 말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이치전에서 패퇴, 겨 들어온 일본군은 성무을 굳게 잠그고 성벽에서 조총을 난사 조선군의 접근을 막았다. 성은 흙으로 쌓은 土城이었으나 매우 굳건했다. 날이 저물어 싸움이 중지되었다.

 밤사이 조선군이 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가운데 적병들이 성밖으로 나와 요소에 복병을 배치하려다 의병의 급습을 받고 성안으로 겨 들어갔다.

 10일 여명을 맞아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고경명군이 서문을 집중 공격하고 있는데 일본군이 밤사이 허술해진 관군 진영을 향해 성밖에서 쏟아져 나왔다. 방어사 곽영이 도망치고, 영암군수 김성헌이 그 뒤를 따랐다. 관군 진영이 걷잡을 수 없어 무너졌다.

 관군 진영을 유린한 적군이 의병진영으로 몰려 들었다. 종사관 안영(安瑛)이 고경명에 피할것을 말했으나 듣지 않았다.

 일본군과 의병간의 백병전이 벌어지고 난전중에 고경명, 그의 둘째 아들 인후(因厚) 그리고 종사관 안영과 유팽노(柳彭老) 등 고경명이 기병때부터 그를 따르던 장수둘이 전원 옥쇄(玉碎)했다.

 고경명의 큰아들 종후(從厚)는 아버지와 동생이 전사를 모른채 의병을 수습하며 적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나 곧 비보를 듣고 다시 뛰어들어 전사자들 속에서 父子의 시체를 찾아 가까운 山寺에 안치했다. 살아남은 의병들과 인근 백성들의 통곡이 그칠줄을 몰랐다.

 큰아들 종후는 남은 의병들로 복수군을 편성, 2차 晉州城 전투에 참전하여 그 또한 전사했으며 노상용(盧尙龍)에 출가한 딸이 丁酉年 2차전쟁때 적군속에서 죽었다. 두아들 모두 문과 급제로 준재들로 종후는 현령으로, 인후는 정자(正字)로 있다가 아버지를 따라 참전했었다.

 3부자와 1녀가 구국의 희병전투에 참전하여 순국한 만세에 빛나는 忠孝義烈(충효의열)의 가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금산성 소조천융경의 제6번대는 全州城 공격에 실패하고 고경명군으로부터 일격을 받은뒤 점령지역을 더이상 확대하지 못하고 있다가 8월17일 의병장 조헌(趙憲)의 충청도 의병 700명으로부터 또다시 일격을 얻어맞고 드디어 전라도 점령을 포기한채 9월17일 경상도 성주(星州)방면으로 철퇴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596년 정유년의 2차전쟁때까지 4년간 일본군은 전라도의 경계를 넘보지 못했으며 그로써 전라도는 전쟁기간중 군량기지(軍糧基地) 병력기지(兵力基地) 수군기지(水軍基地))로서 조선 최후 승리의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나갔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30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