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의 상념들
어느 가을날의 상념들
  • 채수찬
  • 승인 2019.11.12 2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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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거실 창문의 커튼을 열면 바라다보이는 울긋불긋한 나무들로부터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낀다. 한국의 가을은 참 좋은 계절이다. 올 가을은 여유 있게 천천히 와서 천천히 가는 것 같다.

 소년은 쉽게 늙은이가 되는데 배움은 이루기 어려우니

 아주 짧은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연못가 봄날 풀의 꿈을 아직 깨지 못하였는데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은 벌써 가을 소리로구나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주자는 자연의 가을을 보고 자신의 인생에 가을이 왔음을 깨달으며 젊은이들에게 배움에 정진할 것을 권한다.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구절이다.

 인간수명이 길어지면서 인생의 가을도 길어진다. 땀흘려 일하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인생의 가을에 서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보다 큰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종교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이 세상 모든 사상은 진리와 현상 사이의 관계,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갈등과 조화를 얘기한다. 성리학도 이(理)와 기(氣)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기본으로 한다.

 자연과학에서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기를, 무에서 유가 생겼다고 하며, 한 점에서 에너지가 폭발하여 팽창하고 있는 것이 우주의 모습이라 한다. 또한 스스로 복제하는 단순한 생명체가 고등생물로 진화했다고 한다. 우주가 생겨나고 생명이 생겨난 것에 어떤 목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연과학으로부터 설명이 없고, 종교와 철학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견해를 내세운다.

 경제학자인 필자는 모델을 만들어 경제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때로는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 자체를 설명하기보다 현실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을 얘기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그 기준이 되는 모델이 있어야 한다. 최근 기술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사회가 변화되고 경제도 변화되면서 기존의 모델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많이 생겨 생각의 큰 틀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경제학자들이 새로운 사고의 틀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한 동안 정치에서는 이해관계가 다른 세력들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각축해 왔다. 그런데 세상이 자꾸 변해가니 전통적 이데올로기들은 퇴조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아직 형성되지 않아, 앞서가는 나라들부터 혼란을 겪고 있다. 뒤따르는 나라들은 이제 한물간 이데올로기들에 아직도 집착하고 있어 또한 혼란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경향이 심한 편에 속한다. 정치가 산업화 이데올로기와 민주화 이데올로기의 각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조적인 태도는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이씨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실패하고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실패한 것도 사상을 교조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가을은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다. 풍성한 수확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넉넉해진다. 잠시 일터에서 벗어나 울긋불긋해진 숲을 바라보면서, 유익하지도 무익하지도 않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볼 수 있는 기회다.

 주자는 인생이 짧아 배움을 다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였는데, 너무 그렇게만 살 일은 아니다. 봄의 꿈은 봄의 꿈 대로, 가을의 낙엽은 가을의 낙엽 대로 아름답지 않은가. 경제학자든 정치인이든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갈 길을 잃었다고 너무 한탄할 일도 아니다. 별이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경이로운 우주는 어차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계절의 순환 속에 다시 맞은 가을 한 가운데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어 본다.
 

채수찬 경제학자 /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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