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을 포기하는 선진국은 없다
농업을 포기하는 선진국은 없다
  • 조배숙
  • 승인 2019.11.05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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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농업분야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했다.

 정부는 당장 농업에 미칠 영향이 없다며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닌 미래 협상에서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강변하지만, 이는 수사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농업 희생을 전제로 장래 세계무역기구 협상의 대응방향을 정한 것이다.

 다른 산업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농업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불과하다.

 농민들은 정부가 농민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다며 크게 분노하고 있다.

 “대통령인 제가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라던 대통령의 약속도 공수표가 되고만 셈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 WTO출범 당시부터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를 선택해왔다.

 농산물 무역적자수지 악화, 농업기반 시설 낙후 및 낮은 국제 경쟁력, 농가소득 저하 및 농산물 가격의 높은 변동성,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 유지 등이 주된 이유였다.

 24년이 지난 지금, 우리 농업이 개도국 지위를 포기할 만큼 농업 문제가 해결됐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4년간 농축산물 수입액은 무려 4배나 증가했다. 농가소득은 도시근로자 가구소득의 95.7%에서 65.5% 수준으로 추락했다.

 식량자급률은 29.1%에서 21.7%로 떨어졌다. 쌀을 제외하면 10% 미만이다. 농업선진국은 그야말로 먼 나라 남의 얘기일 뿐이다.

 정부는 우리나라 경제가 WTO 가입 이후 GDP규모 세계 12위, 수출 규모 세계 6위, 국민소득 3만 달러 등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 국제사회에서 개도국으로 더 이상 인정받기가 어려워졌다는 이유를 들었으나 농업분야는 여전히 개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또한 WTO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며 예산 등 농업분야 지원 강화를 당근책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내년도 농식품부 예산안은 올해보다 4.3% 증가한 15조2,990억원이다. 전체 평균 증가폭인 9.3%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 전체 예산안 대비 비중도 2.9%로 3%대도 무너진 상황이다.

 공익형 직불제 조기 도입, 청년·후계농 육성을 위한 청년영농정착지원금 제도, 농지은행 등 사업 확대 검토, 국내 농산물 수요확대를 위한 지역생산물 지원 강화 및 주요 채소류 가격 안정제 지속 확대 등도 근본적인 처방인지는 의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WTO개도국 지위 포기를 결정하며 정작 이해당사자인 농업계와 충분한 협의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농업계는 그 어떤 소통도 없었으며 개도국 지위 포기 시 피해 대책 마련도 소홀히 했다고 성토한다. 한마디로 농업과 농민홀대의 결과라는 입장이다.

 농민들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를 사전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다면 농업과 농민홀대를 넘어 포기나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 농업분야 개도국 지위는 지난 24년간 유지돼왔다.

 최근 미중 간 무역 갈등이 심화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겨냥하여 한국의 개도국 지위 포기를 요구한 데서 비롯됐다.

 외신들도 우리 정부가 WTO개도국 지위 포기 배경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이 작용했다고 보도했다.

 농민단체들은 WTO출범 당시, 농업분야만큼은 제조업과 달리 예외적으로 개도국 지위를 선택한 권리이므로 정부가 미국에게 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는 주장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농정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정부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까지 농업분야는 희생을 강요당해왔다.

 공업일변도 불균형 성장정책의 희생양도, 무분별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의 제물도 농업이었다.

 잔매에 장사 없고 잔매에 골병든다 했다. 지난 24년간 대증요법에만 기대어 걸어온 우리 농업의 현주소다.

 WTO개도국 지위 포기는 우리 농업을 지탱해온 마지막 안전핀을 제거하는 것과 같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WTO개도국 지위 포기 방침을 철회하고 농업계와 우리 농업의 기사회생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농업을 포기하는 나라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조배숙<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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