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자존…부안 3현(賢) 김구, 유형원, 전우
전북의 자존…부안 3현(賢) 김구, 유형원, 전우
  • 김영호 기자
  • 승인 2019.11.0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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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유학진흥원 시리즈> 전북의 자존을 찾아서 <1>

 전라북도 ‘부안 3현(賢)’은 불교를 대체할 새로운 학술 사상으로 성리학을 도입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자 현인을 말한다.

 ‘부안 3현’은 고려시대 지포(止浦) 김구(金坵) 선생과 조선시대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선생, 조선시대 성리학의 불씨를 후세에 전한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이다.

 지포 김구 선생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충렬왕 때 ‘고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지포집(止浦集)’을 남긴 후 묘소는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있다.

 반계 유형원 선생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기거하며 26권 분량의 대작인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간재 전우 선생은 조선 후기 부안 계화도에서 일생을 마감하기 전 수많은 제자와 저서를 통해 전통 유학사상을 실현한 학자였다.

 평소 유학에 관심이 많은 송하진 전북도지사는 ‘부안 3현’을 전라도 학문과 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로 치켜세운 바 있다.

 최근 전북도는 부안지역에 전라도 지역 문화유산을 수집, 연구하기 위한 ‘전라유학진흥원’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본보는 전북의 학술을 대표하는 부안 3현을 조명하고 전라도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전라유학진흥원 추진에 대해 2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김구(金坵)

 김구(金坵) 선생(1211년~1278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지금의 전북 부안인 부령(扶寧)이며 호는 지포(止浦)로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능해 1232년 2등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 제주판관이 됐다. 김구는 큰 학자이자 지대한 외교 업적을 남긴 정치가로 원나라에 대한 외교 문서를 담당했고 원나라에도 다녀와 이때 지은 기행문으로 ‘북정록(北征錄)’이 있다. 8년 동안 한원(翰院)에 재직했고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국학직강(國學直講)이 됐다. 최항(崔沆)의 명으로 지은 ‘원각경(圓覺經)’의 발문 시가 최항의 뜻과 맞지 않아 좌천되기도 했다. 1263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추밀원부사,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이부상서 때는 호복(胡服) 호례(胡禮)를 하는 상장군(上將軍) 강윤소(康允紹)를 꾸짖었고, 참지정사(參知政事) 때는 문신들의 저술을 시험해 유능한 자에게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를 거쳐 참문학사(參文學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까지 역임했다. 1276년 통역관을 전문적으로 교육 관리하는 기구인 통문관(通文館) 설치를 건의해 비서성, 한림원, 보문각 등 7품 이하 관직에 있는 40세 미만인 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게 했다. 이장용(李藏用), 유경 등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의 3대 실록을 편찬했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저서로 ‘지포집(止浦集)’이 있으며 묘는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있다.

  

 ▲유형원(柳馨遠)

 유형원(柳馨遠) 선생(1622년~1673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반계(磻溪)이다.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寬)의 9세손으로 유형원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난 뒤 사회가 어지럽고 양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던 시기에 태어났다. 아버지 유흠은 유몽인(柳夢寅)의 역옥(逆獄 : 역적에 관련된 옥사)에 연좌되어 28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했다. 유몽인은 인조반정 후 은둔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죄로 처형됐는데, 이 사건에 유흠도 무고하게 연루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옥사는 유형원이 훗날 관직에 대한 뜻을 포기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유형원은 5세 때부터 외삼촌 이원진(李元鎭)과 고모부 김세렴(金世濂)에게서 글을 배웠다. 이원진은 이익(李瀷)의 당숙으로 하멜표류사건 당시 제주목사로 있던 인물이고,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를 거쳐 대사헌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32세의 나이로 9대조 유관의 사패지(賜牌地 : 임금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인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면서 여러 차례 전국을 유람했다. 조선 사회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해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31세 때부터 집필을 시작한 반계수록은 49세 때 완성됐다. 1670년에 완성된 26권짜리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사상과 국가 건설 계획을 담은 대작이었으며 반계수록 외에도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수십 권의 저서를 남겼다.

 

 ▲전우(田愚)

 전우(田愚) 선생(1841년~1922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추담(秋潭)·구산(臼山)·간재(艮齋)이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난 전우의 학문 성향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였던 스승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우는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고 그들의 문집 중에서 좋은 문장을 가려 뽑아 오현수언(五賢粹言)을 편찬하는 일에 참여했다. 아울러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일에도 힘을 썼다. 1882년에 선공감 가감역(繕工監 假監役)·전설사 별제(典設司 別提)·강원도 도사, 1894년에 사헌부 장령, 1895년에 순흥 부사·중추원 찬의(中樞院 贊議) 등을 제수 받았지만 모두 사양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도학(道學)을 일으켜서 국권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1912년 72세가 되던 해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고 계화도(繼華島 : 중화사상과 유가사상을 잇는다는 뜻)라고 부르면서 저술과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1922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진영(吳震泳), 최병심(崔秉心), 이병은(李炳殷), 송기면(宋基冕), 권순명(權純命), 유영선(柳永善) 등 3,000여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저서로 간재집, 간재사고(艮齋私稿), 연원정종(淵源正宗), 안자편(顔子篇) 등이 있다. 전우는 성리학 연구 업적과 전통적 유학사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였다. 전북 익산에 묘소가 있으며 계화도의 계양사(繼陽祠), 고창의 용암사(龍巖祠), 정읍의 태산사(台山祠), 의령의 의산사(宜山祠) 등에 배향됐다.

 김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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