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전령사
가을 전령사
  • 정성수
  • 승인 2019.10.30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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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바람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아 바람 중 으뜸이다. 바람같이 떠난 사람, 바람같이 돌아올 것 같아 가슴 설렌다. 가을바람은 사람을 센티멘털하게 만들어 어딘가로 떠나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주저앉게 만들기도 한다.

 낮에만 해도 새털구름이 하늘에 꽃무늬를 펼쳐놓더니 저녁이 되자 별들이 하나 둘 눈을 뜬다. 이제 초록 잎들은 하루가 다르게 노랗거나 빨갛게 변해, 화려한 단풍 잔치를 치루고 나면 나뭇잎들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수많은 말 중에서 돌아간다는 말처럼 쓸쓸한 말은 없다. 거기다가 가을바람의 소슬함, 가을빛에 물드는 과일, 자꾸만 비어가는 논밭, 시들어가는 꽃들, 애절한 풀벌레 울음, 북녘으로 나라가는 기러기 떼 등은 우리를 시름에 젖게 한다. 그래서 마음(心)에 가을(秋)을 올려놓으면 시름(愁)만 쌓인다고 한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귀뚜라미가 운다고 하지만 나는 귀뚜라미가 노래한다고 말한다. 밤의 백미인 가을밤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뚜라미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별 중에서 자신의 별을 찾는 사람들은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다.

 한여름 등이 터져라 울어대던 매미가 사라지면 도시의 콘크리이트 틈새나 시골 마루 밑에서 나는 귀뚜라미의 노래는 폭력적이 아니어서 좋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설쳐대는 인간들보다 백배나 났다. 맑고 투명한 귀뚜라미의 노래에 취하다 보면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사람이 그립다. 당당하되 교만하지 않고, 비난 앞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 겸손함과 평정심을 잃지 않으면서 마음이 포근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면 사는 일을 칼날 같은 세파에 베이지 않을 것이다.

 코스모스는 연한홍색, 백색 등 품종에 따라 끝이 톱니처럼 얕게 갈라져 산뜻한 이미지를 준다. 가냘픈 소녀를 연상케 하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모습은 살아있는 한 폭의 동양화다. 창조주가 세상을 만들고,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생각해 만든 꽃이 코스모스다. 이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민 꽃이 코스모스라니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가을 산자락과 들녘은 산국, 감국, 해국이 지천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피고 져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국화는 가을의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다. 창조주가 코스모스를 만들어 놓고 아쉽고 부족한 것 같아 그것을 채우려고 만든 꽃이 국화다. 코스모스로 시작해서 마지막을 국화로 방점을 찍어 꽃의 이미지를 완결했다.

 가을이 풍성한 것은 알곡이 있기 때문이다. 비바람을 견딘 황금 들녘은 낫을 기다리고 나무에 매달려 있는 탐스런 과일은 만복의 기쁨을 준다. 이제 창고에 들어가는 날과 시장이나 길거리 좌판에 올라앉는 일만 남았다. 한 생은 결국 순환하는 계절을 따라가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채우기 위해 싸우고 발버등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한 평의 땅을 차지하고 만다.

 청량한 가을밤 별들을 바라보면, 무량광대한 우주 앞에 초라한 것이 인간임을 알게 된다. 특히 가을밤에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이 없다거나, 귀뚜라미 노랫소리 들리지 않거나, 코스마스와 국화꽃이 없다면 삶이 얼마나 아득하고 삭막할까? 깊은 생각과 넓은 마음을 가진 가을 전령사들이 있어 가을밤이 외롭고 쓸쓸하고 허전한 것만은 아니다.

 

 / 정성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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