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0)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0)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11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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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 골조(骨造) 조선군함 일본배 들이받아 깨뜨려

 제1차 출동에서 개선한 이순신은 여수 본영에 돌아오자 장병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지체없이 조정에 상세한 보고를 띄우고 전투선의 수리와 총포의 정비 그리고 화약의 제조와 군량의 비ㅜㄱ 등 2차 출동 준비에 전력을 다해 나갔다. 활쏘기와 각종 화포의 발사훈련 등 군사훈련도 한층 강화했다.

 군관 이언량(李彦良)과 이기남(李奇男)을 거북선 돌격대장으로 임명, 거북선의 돌격전투와 화포사격훈련을 거듭했다. 다음번 출진에는 거북선을 출동시킬 계획이었다.

 5월23일 1차출동때의 전공으로 이순신은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했다.

 27일 원균으로부터 또다시 급보가 들어왔다.

 ’적선 10여척이 사천(泗川) 곤양(昆陽)까지 쳐들어와 경상우수영은 배를 남해땅 노양(露梁:설천면 노양리)으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원래 이순신은 우수영 이억기(李億祺)수사와 6월3일에 여수앞바다에서 만나경상도 수역으로 출진키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날까지 기다리다가 일본군이 전라도 수역까지 몰려올는지 모를 일이었다. 뒤따라 오도록하고 앞서 출진키로 했다. 군관 이사공(李思恭)을 유진장(留陳將)으로 본영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정걸(丁傑)을 흥양(興陽)에 나가 만일에 대비케 했다.

 29일 전투선 23척으로 출항했다. 전투서여은 1차출동때와 다르게 ▲중위장 순찬부사 권준(權俊) ▲전부장 방답(防踏)첨사 이순신(李純信) ▲후부장 흥양현감 배흥립 ▲좌척후장 녹도관호 정운 ▲별도장 우후(虞候) 이몽구(李夢龜) ▲우별도장 여도(呂島)권관 김인영(金仁英) ▲간후장 군관 가안책(賈安策) 군관급제 송성(宋晟) 南海현령 기효근(奇孝謹) 군관봉사 나대용(羅大用) ▲참퇴장 전 첨사 이응화(李應華) ▲소비포 권관 이영남(李英男) 전봉사 이엽 등을 새로 임명하고 중부장 좌부장 우부장 우척후장은 1차출동때의 어영담 신호 김득광 김완 등을 그대로 임명했다.

 원균의 하동(河童:광양군 진월면 선소리)에서 전투선 3척을 거느리고 나와 합세, 모두 26척이 되었다.

 노량을 지나 사천을 향하는데 곤양(昆陽)쪽에서 나온 적선 1척이 걸려들었다. 전부장 이순신과 간후장 기효근이 쫓아가 일격에 불태워 버렸다. 멀리 사천선창 쪽에 적선 12척이 정박해 있고 수백명의 적병이 육지에 올라있었다. 기치와 창검이 가득한 가운데 잠수용 진막도 보였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바닷물이 빠져있어 수심이 얕고 선창이 좁았다. 함대를 뒤로 물리자 적들이 조선수군이 겁먹고 도망치는 것으로 안듯 넓은 받로 달려 나왔다. 때마침 바닷물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함대를 돌려 거북선을 선두로 일제히 돌격히 들어가 닥치는대로 부수고 불질렀다.

 돌격선으로 선두에 선 거북선이 위력을 발하였다.

 엎드린 거북 모양의 이 신기하게 생긴 신형 전투함에 일본군이 넋을 잃었다. 이물(뱃머리)에는 용머리가 있는데 입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운 연기가 뿜어 나오고 고물(배꼬리)에는 거북꼬리가 달렸다. 거북잔등 같은 지붕이 씌워있고 사면이 방패로 막혀있어 배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먼배(맹선盲船)’라고도 했다.

 그러나 안에서는 밖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육중한 선체로 일본 군함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더니 난데없이 사방 팔방으로 대포가 터져 나왔다. 대포알을 맞은 일본군함이 박살이 났고 그렇지 않은 군함은 떠받아 버렸다. 그럴때마다 일본군함은 와지끈 부서졌다.

 배와 배가 부딪치는 접현전(接舷戰)에서 주요 부자재가 통나무로 된 조선군함에 각목과 판자로 된 날렵한 일본군함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피아의 전투선이 뒤섞여 혼전을 벌일때 조선순함들은 또 하나의 강점이 있었다.

 일본배나 서양배들의 노(櫓)는 쭉 곧은 목봉(木棒)에 끝부분(노깃)만 주걱처럼 넓적하며 배에 앉아서 거의 수평으로 수면의 물을 저어 배를 앞으로 전진시킨다. 따라서 배들끼리 근접하면 서로 걸려 노를 저을수 없게 되고 움직이지 못한다. 보트나 카누경기에서 보는 그런 노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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