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15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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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출동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서 일함 67척 격파

 당항포는 포구앞 바다에서 고성군 회화면과 동해면 사이를 20여리나 깊숙이 들어가는 좁은 만(灣)에 자리잡고 있어 양편 산기슭에 복병이 배치될수도 잇는 지형이었다. 척후선을 미리 보내 적정을 살피도록 했다.

 잠시후 신기전이 불꼬리를 달고 하늘로 솟아 올랐다. 따라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거북선을 앞세우고 뱃머리와 꼬리를 서로 물며 일렬로 줄을 서 일제히 포구 안으로 쳐들어 갔다.

 만일에 대비하여 포구의 바다 입구에 전투선 4척을 대기시켜 두었다.

 조선수군의 판옥선만한 크기의 배가 9척, 중간크기가 4척 그리고 작은배 13척이었다. 가장 큰 배에는 3층 누각(樓閣)이 있었고 불전(佛殿)같이 단청을 했는데 검은 휘장안에 장수인듯한 자가 앉아서 지휘하고 있었고 그 주변에 수많은 적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서 적선에서 콩볶듯 하는 총소리와 함께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때 이순신이 령을 내려 진형을 바꿔 나갔다. 그러는 사이 포위망에 구멍이 뚫리고 조선수군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포위망에 틈이 생기자 적선들이 그 사이로 빠져 나가려 했다. 적장이 탄 3층누각의 배를 서너척의 큰배가 호위하고 그 뒤를 다른 배들이 따랐다.

 이순신의 령이 다시 떨어졌다. 적선들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조선수군의 협격(挾擊)이 시작됐다. 조선수군 전함들로부터 각종 총통들이 불을 뿜었고 크고 작은 불화살들이 날았다.

 3층누각선이 불길에 휩싸였고 태연히 앉아 작전을 지휘하던 적장이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조선수군들의 화살이 비오듯 쏟아져 나갔고 승자총통의 총알도 우박처럼 날아들어 갔다.

 이 전투가 끝난뒤 조정에 보낸 장계에는 마름쇠탄(彈:질려탄)과 대발화(大發火)라는 무기를 쓴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대발화는 대완포로 쏘는 진천뢰(震天雷)가 아닌가 한다. 달아나는 적선은 사조구(四爪鉤)로 끌어당겨 박살이 났다.

 어두워져 포구 밖 바다에 나와 진을 치고 밤을 샜다. 이순신은 처음 적선들을 몰아붙이다가 그대로 공격을 하면 적병들이 배를 버리고 뭍으로 달아날 것으로 판단. 일단 퇴각하는 모양으로 길을 열어주어 적병들이 모두 배에 타게 한뒤 협격을 가해 적병 태반을 수장시킨 것이다.

 ’죽은 왜적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왜장의 머리를 7개나 베었다. 남은 왜병은 육지로 달아났으나 그 수효는 많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가 하능 높이 솟았다’ 이날의 난중일기 내용이다.

 6일 아무래도 어제의 전투에서 적선 1척이 살아 남았던 것 같아 방답첨사 이순신이 포구밖 어구에 잠복해 있었다. 새벽에 과연 적선 1척이 어슬렁거리며 빠져나왔다. 일격에 깨뜨려 버렸다. 배에 타고 있던 적병 1백여명과 청년 장수 1명이 수장됐다. 제1차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이었다.

 해전때마다 이순신이 분전하는 동안 원균은 죽은 일본군의 목을 베거나 전리품을 주워 모으는 일에만 전념, 군사들의 비난을 샀다.

 이순신은 그에 개의치 않았다. 뒷날 원균은 이를 근거로 자신도 전공이 있었는데 이순신이 보고하지 않았다고 모함, 그를 백의종군케 한다.

 조선 수군은 이날 저녁 고성땅 마을우장 앞바다로 옮겨 군사를 쉬게했다.

 여기서 그는 조정에 ’당항포승첩장계’를 올렸다. 2차 출동의 전공으로 이순신은 자헌대부(資憲大夫:正二品)로 오른다.

 7일 아침 일찍 출항, 거제도 영등포(永登浦)앞바다에 이르러 적선이 율포(栗浦:동부면 율포리)에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율포에 다가서자 적선이 모든 짐들을 바다에 버리고 도망쳤다. 뒤쫓아가 사도첨사 김완이 1척을, 이몽구가 1척을 그리고 녹도만호 정운이 1척을 나포했다.

 4척은 불화살로 태우고 깨뜨렸다. 적장 구루시마 미치히사가 뭍으로 도망쳤다가 배를 갈라 자결했다.

 율포해전(栗浦海戰)이었다.

 조선수군은 2차출동 5월29일, 6월2일과 5,6,7일 5일간의 사천 당포 1차 당항포 율포 네차례 해전에서 일본군 전투선 67척을 격파하는 연승을 거두고 8,9,10일 사흘간 부근 해역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적선을 발견할 수 없어 미조항(彌助項:남해군 삼동면 미조리)앞 바다에서 헤어져 각각 본영으로 개선했다.

 2차출동에서도 조선수군 전투선 손실은 없었으나 전사 14명, 부상 36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2차출동때의 일본군 역시 2차때의 적장들 휘하 수군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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