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1)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11)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1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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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어깨 뚫는 총상(銃傷)불구 전투지휘 계속해
거북선 단면도

  조선의 노(櫓 / 거북선 단면도의 ’노’ 그림 참조)는 다르다. 구부러진 목봉을 수직으로 물속에 넣어 선채로 물속을 휘저으며 배를 앞으로 전진시킨다. 따라서 배들끼리 아무리 근접해도 노를 저을수 있으며 배를 움직일 수가 있다. 나룻배의 노가 이같은 조선식 노다.

 조선 군함들은 조선식 큰노로 저어 적함들 속에 깊숙이 들어가 좌충우돌을 했던 것이다.

 조선수군의 전투선은 한 척의 손실없이 적선 12척을 모조리 깨뜨리고 불태웠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빗발치듯 화살을 퍼붓고 총통을 바람과 우뢰같이 쏘아대니 화살에 맞은 적의 수효가 몇 백명인지 헤아리기 힘들었다’(난중일기).

 사천해전(泗川海戰)이었다.

 이 전투에서 군관 나대용이 총알을 맞았고 이순신도 탄환이 왼쪽 어깨를 뚫고 등으로 나가는 관통상을 입었어도 ’중상정도는 아니었다’며 전투지휘를 계속해 나갔다. 조선수군 중에도 ’탄환에 맞는 숫자가 또한 많았다’

 날이 저물어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毛自郞浦:읍남면 주문리)로 빠져나와 이날밤을 지냈다. 6월1일 정오쯤에 사양도(蛇梁島:통영군 원양면 양지리)로 진을 옮겨 적정을 살피는 한편 병사들을 쉬게했다.

 2일 밤사이 적선 20여척이 당포(唐浦:통영군 산양면 삼덕리)에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아침 일찍 전군이 출동, 상오 10시쯤 도착해보니 큰 배 9척, 중간 배 12척을 선창에 정박시켜 놓고 300여명의 일본군이 일부는 성안에서 분탕질을 치고 일부는 조총을 쏘며 대항해 왔다.

 적선을 에워싸고 돌격장 이기남이 지휘하는 거북선을 선두로 돌격해 들어갔다.

 적선 가운데 조선 수군의 판옥선만한 배에 두 길이 넘는 누각이 있는 배에 붉은색 휘장을 두르고 황금색 문자가 쓰여있는 깃발이 요란했다. 누각에 적장이 꼼짝도 하지않고 앉은채 지휘하고 있었다.

 천자(天字)총통으로 길이 360sm, 무게 30kg에 21sm나 되는 쇠창살(생철촉)이 꽂혀있는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았다. 적장이 탄배에 구멍이 뚫리고 기우뚱하는 사이에 순천부사 권준이 화살로 적장을 쏘아 맞혔고 거꾸로 떨어진 그를 사도첨사 김완이 군관 흥양보인 진무성(陳武晟)이 달려가 목을 베었다.

 흩어지는 적군에 ’크고 작은 승자(勝字)총통을 억수같이 마구 쏘아대고 화살을 퍼부어대니 쓰러지는 적이 얼마나 되는지 알수 없었다. 왜적은 남기지 않고 모두 섬멸했다’

 21척의 적선을 모조리 깨뜨리고 불태웠다.

 잠시후 ’큰 왜선 20여척이 부산쪽으로 바다에 늘어서서 오다 우리 수군을 보고 혼비백산항 개도(介島)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당포해전(唐浦海戰)이었다.

 이날은 진주(晋州)땅 창선도(昌善島)에서 보냈다.

 3일 아침 일찍 출항하여 추도(통영군 산양면)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어제 달아난 적선을 찾지 못했다. 고성(固城)땅 고둔포(古屯浦)에서 밤을 지냈다.

 4일 정오쯤에 전라우수영 이억기 수사의 전투선 25척이 도착했다. 전라좌·우수영 48척, 경상우수영 3척 모두 51척의 대규모 연합함대가 편성되었다. 군사들의 사기는 충천했다. 이날 밤을 착양포(鑿梁浦:통영군 산양면 당동리)에서 보냈다.

 5일 아침 안개가 바다 가득히 깔려 있다가 늦게야 걷혔다. 일본인으로 조선에 귀화, 거제도에 사는 김모(金毛) 등 78명의 주민들이 작은 배를 타고와서 "당포에서 달아난 적선들이 거제도를 지나 고성땅 당정포(회현면 당정리)에 있다"고 알려 왔다.

 전군을 전진시켜 거제도와 고성군 사이 해역에 이르러 멀리 진해쪽을 보니 육지에 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조선군이었다. 척후선을 보내 알아보니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의 기병 1,100명이었다. 조선의 육군도 개전 초기 연전연패의 에서 벗어나 점차 대오를 정비하고 일본군을 능동적으로 요격하기 시작했다. 육군의 사기 회복에는 이순신함대의 잇단 승전보에 크게 고무되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9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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