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8)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8)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06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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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전함은 판옥선(板屋船)…거북선은 공격선(攻擊船)으로 3적뿐

 국가 존망이 걸린 큰 전쟁이 터지기 전의 숨가쁜 하루하루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령이 1년전이 아닌, 반년 전이거나 한달 전이었더라면 조선의 운명이 어찌 되었을까?

 전쟁중 거북선이 몇척이었는가에 대해 최영희(崔永禧)교수(한림대 한국사)는 ’3척’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할때 전쟁기간중 조선 수군의 주력함은 어디까지나 판옥선(板屋船)이었으며 거북선이 돌격선으로 맹위를 떨치기는 했으나 이순신이 전쟁이 터진 다음해(계사년癸巳年) 12월까지 전투선 35척을 새로 건조하면서도 거북선을 한두척 더 건저한데 그친 것으로 미루어 지금 사람의 생각처럼 그렇게 신화적인 전투선은 아니었던것 같다. 그 신깃한 생김새로 후세에 더 유명해진게 아닌가 한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그날 그날의 일기(日氣)를 꼬박꼬박 기록해 놓았다. 날씨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마련인 수군지휘관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수십만명의 무고한 인명이 무참하게 살생되는 비극적인 전쟁에 하늘도 미리 슬퍼했음이었을까? 그해는 유난히도 비가 많았다.

 전쟁이 터진것을 이순신이 안것은 이틀뒤 15일 저녁 무렵이었다. 원균으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왜적선 90여척이 절영도에 들어왔다’

 거의 동시에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도 왔다.

 ’왜적선 350여척이 부산포에 들어왔다’

 뒤이어 경상도 관찰사 김수로부터도 왔다. 16일 부산진 함락 소식에 이어 경상도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통분함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일기에 썼다. 전군에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19일에는 신병 700명을 보충했다.

 20일 김수로부터 응원요청이 왔다. 뒤따라 원균이 경상도 소비포(所非浦) 권관 이영남(李英男)을 보내 구원을 요청해 왔다. ’조정의 명령없이 관할구역을 벗어날 수 없다’고 거절해 보냈다. 이영남이 5-6차례나 왔다. 거절 당하고 갈때마다 원균이 뱃머리에서 통곡을 했다.(징비록 유성룡)

 27일에야 조정으로부터 선전관 조명(趙銘)이 와서 논서(論書:임금의 명령서)를 전했다.

 ’원균과 합세하여 적선을 곡파하라’

 마침내 조정의 출전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5월1일 좌수영 산하 전군을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장수들을 모아 작전을 협의했다. 우수영 군사도 합세케 하기로 하고 사람을 보냈다. 원균에게는 4일 당포(唐浦) 앞바다에서 만나자고 통첩했다. 2일 적정을 알아보고 지형 정찰을 위해 南海까지 다녀온 군관 송한연(宋漢連) 등이 그곳 현감과 진영의 장수들이 모두 도망치고 무기 등 모든 물자가 남김없이 흩어져 버렸다고 보고 했다. 이순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일기에 썼다.

 3일 아침내내 가랑비가 내렸다. 원균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이억기의 우수영 군사를 기다렸으나 종일 나타나지 않았다. 녹도 만호(鹿島 萬戶) 정운(鄭運)이 "왜적이 한성에 가깝게 가고 있는데 기회를 놓치면 소용이 없다"며 나가 싸우자가 주장했다. 실제는 이날 일본군이 한성에 입성했다.

 다음날 새벽 출진키로 결정하고 조정에 보고서를 올렸다. 우수영 군사는 뒤따라 오도록 했다. 이날 여도(呂島:고흥군 정암면 여호리) 권관 황옥천(黃玉千)이 탈영했다. 군사를 그의 집으로 보내 잡아다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했다. 이순신의 군령(軍令)은 서릿발 같았다.

 전투서열은 다음고 같이 편성했다.

 ▲주장 좌수사 이순신 ▲좌부장 약안군수 신호(申浩) ▲우부장 보성군수 김덕광(金德光) ▲전부장 흥양현감 배홍립 ▲중부장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중위장(中尉將) 방로첨사 이순신(李純信) ▲좌척후장(左斥候將)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우척후장 둔도첨사 김완(金浣) ▲후부장 녹도만호 정운 ▲좌부기전통장(左部騎戰統將) 순천대장 유섭 ▲우부기전통장 진군관보인 이춘(李春) ▲간후장 군관급제 최대성(崔大成) ▲참퇴장(斬退將) 군관급제 배응록 ▲돌격장(突擊將) 군관 이언양(李彦良) ▲유격장(游擊將) 발포가장(鉢浦假將) 나대용(羅大用)

 출동 전투선 및 병력은 다음과 같이 편성했다.

 ▲판옥선(板屋船:대맹선급大猛船級) 24척 병력 약 4천명 ▲협선(挾船 중맹선급) 15척 약 1천명 ▲포작선(소맹선급) 46척 약 1천600명

 이순신에게는 생소한 경상도 수역의 물길안내는 어영담이 맡았다. 그는 함안(咸安)출신으로 무과급제후 남해 각지에서만 근무했기 때문에 남해바다를 자기집 뜰안 거닐듯 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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