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7)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7)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1.04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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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수군의 군세(軍勢)는 세계적 수준이었다

 조·일전쟁이 터지고 조선의 남해 다도해에서 조선과 일본 두나라 수군이 대규모 해전을 벌이기 4년전, 1588년 8월7일 지구의 반대쪽 유럽의 영·불해협 영국쪽 칼레해안에서 영국과 스페인 두나라 해군 사이에 세계 해전사상 가장 유명한 대규모 해전이 벌어졌다.

 그무렵 세계의 바다는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지배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1492-1493)한 콜롬부스와 최초의 세계일주(1519-1592)를 한 마젤란은 스페인, 인도항로를 개척(1498-1499)한 바스코 다 가마는 포르투갈 탐험가들이었다.

 이 두 나라의 상선대는 전 지구를 누볐으며 재화를 이베리아 반도로 실어 날랐다. 자연히 상선대의 보호를 위해 강력한 해군력을 유지했다.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세계 최강이었다.

 ’스페인이 움직이면 세계가 전율한다’고 했다.

 이해 5월 스페인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의 영국을 치기 위해 필리페 2세가 무적함대를 출동시켰다. 수병 8천명, 대포 2천문으로 무장한 127척의 전투함으로 편성, 1만9천명의 육군을 승선시켜 로마제국 이래 최대규모의 함대로 출진했다.

 그러나 스페인이 무적함대는 영국함대에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로부터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영광은 영국에 넘겨주었다.

 영국함대는 수병 8천, 전투함 80척 규모였다. 스페인 함대가 바다를 모르는 메디나 시드니아가 지휘한데 반해 해적출신의 유능한 드레이크가 지휘하는 영국함대가 멀리 온 스페인 함대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화공을 퍼부어 73척을 격침시키고 스페인 수병 4천명을 수장시켰다. 영국 수병의 전사자는 1백명이었다.

 조·일전쟁이 터지고 경상도 수군이 자멸해 버린뒤 조선수군 함대는 전투선 160여척(전라좌수영 42척, 우수영 54척, 충청수영 60척, 경상수영 5척) 보조선 1백여 척, 전투병력 약 2만명(판옥선 164명 대맹선 80명 평균 100명, 보조선 평균 30명 기준) 화포 1천여 문(전투선당 6문기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경상도 수군이 자멸해 버리지 않았더라면(경상도 수군은 전라 충청도 수군을 합친것 보다 규모가 컸다고 함) 전투선 3백여척 보조선 2백여척 병력 4만여명 화포 2천여문이 된다.

 조선 수군은 그 함선수와 병력규모 그리고 화력에 있어서 16세기 세계적 해군국이었던 유럽의 스페인과 영국 해군에 못지 않은 전투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규모의 함대라 할지라도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와 정유(丁酉)년 2차전쟁때 원균(元均) 휘하 조선수군의 괴멸이 말해주듯 전투에서의 최후 승리는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판가름 난다.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방비를 수축하고 전투선과 무기들을 정비하는 한편 군사들을 맹훈련, 강병으로 단련시켜 나갔다.

 전쟁이 터지던 해 1592년1월1일(음력)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난중일기’에는 전쟁이 터진다는 확신아래 전쟁준비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하루하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간단없이 일선을 순찰하며 방책을 서둘렀고 전투선과 무기들을 점검, 정비를 소홀히 한자는 곤장으로 엄히 다스려 군기를 바로 세워 나갔다. 공무(公務)의 틈만 나면 거의 매일이나 다름없이 자신이 앞장서 활쏘기 등 전투훈련을 실시했으며 병서를 탐독했다. 친구이며 좌의정인 유성룡이 보내온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밤새워 독파, 해전과 육전에서의 화공(火攻)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순신이 언제부터 거북선을 만들기 시작했고 언제 진수(進水)시켰는지 그리고 몇 척을 건조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난중일기에 전쟁이 터지기 보름전 3월27일 ’소포(召浦)에 가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했다’고 했고, 전쟁이 터지기 이틀전 ’처음으로 돛배를 만들었다’고 하여 아마도 거북선에 돛을 올린것이 아닌가 추측케하며 다시 전쟁이 터지기 하루전 4월12일 ’거북선에서 지자(地字) 현자(玄字)포를 쏘았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4월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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