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6)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6)
  • 김재춘
  • 승인 2019.11.01 02: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도 삼별초군 세계 제국 元軍과 3년 독립전쟁

 청해진은 846년 신라 문성왕(文聖王) 8년 그의 세력을 겁낸 조정의 왕족세력이 보낸 염장(閻長)이란 자객에 의해 장보고가 암살되고 5년 뒤 85년 鎭을 폐쇄함과 동시에 주민들을 벽골(碧骨:현 김제)郡으로 모두 이주시킴으로써 그 위세가 사라지고 말았다.

 여수일대 바다 용병들의 전통은 고려가 몽골(蒙古:元)의 지배 아래가 들어가기 직전 삼별초(三別抄)의 대몽항전(大夢抗戰)에서 다시 그 위력을 드러냈다.

 1231년(高宗 18년) 1차 침공이래 몽골족의 元나라는 1259년(고종 46년) 조정이 항복할 때까지 무려 6차례나 高麗를 침공했다. 무신정권 아래의 고려 조정은 강화도(江華島)로 수도를 옮겨놓고 줄기차게 항쟁했으나 아시아 전역은 물론 유럽대륙에 걸쳐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 元나라에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무신정권을 지탱하던 삼별초군의 배중손(裵仲孫) 김통정(金通精) 등이 왕과 문신들의 항복과 개경(開京:개성)환도를 따르지 않고 1270년 6월1일 왕족 승화후 온(承化候 溫)을 왕으로 한 독립정부를 세운뒤 1천여 척의 함선에 추종세력과 물자를 싣고 남하, 서남해안의 요충 진도에 도성 용장성(都城 龍藏城)을 쌓고 제주도를 포함한 다도해 일대를 장악하고 元나라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계속한다.

 여기서 진도의 삼별초 정부는 처음 남하할때 동행했던 군사들은 기간으로 여수 일대 ’海事에 能한 軍丁’들을 충원, 세력을 유지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고려사(高麗史 권卷 103, 104)는 당시 ’전라도의 州郡이 바람에 쓰러지듯 삼별초 정부에 영항(迎降)해 버리는 기세’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삼별초 정부 수군은 30척의 전선으로 100척의 개경정부 김방경(金方慶) 元의 아해(阿海) 연합함대를 대파하는 등 우세한 전력을 과시했다.

 진도항쟁 1년여 만에 삼별초 정부는 개경정부와 원나라 연합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배중손 등이 죽구 김통정은 주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탈출, 다시 2년여의 항전을 펼치다가 1273년(元宗 14년) 4월28일 최후를 맞았으며 고려는 전면적으로 원의 속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중·일 해상교역 중심지로서의 여수 앞바다의 중요성이나 이 일대 사람들의 해상활동은 여전했다. 元代말기 1323년 무렵 중국 용천요(龍泉窯)에서 구운 청자 9,600여 점을 비롯 20t의 동전과 8t의 가구재 등 18,000여 점의 물자를 가득 실은 무역선 한 척이 다도해 新安 앞바다에 침몰한다. 이 배는 653년의 긴 침묵끝에 1976년 1월 한 어부에 의해 발견되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신안해저유물선(新安海低遺物船)이다.

 고려의 한을 남긴 진도항쟁뒤 319년 여수지방 바다의 용병들은 명장 이순신과 함께 일본 침공군을 맞아 다시 한번 그 위력을 드러낸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3월18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