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5)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5)
  • 김재춘
  • 승인 2019.10.30 01: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조(宣祖)와의 대화(對話)..."全羅人들 倭人들 두려워 않아"

전라도 병사들은 원래 일본군에 강했다.

 임진년 1차 전쟁때 일본군은 함경도까지 조선 전역을 석권하면서도 유일하게 전라도 진공작전에서만 패퇴했고 다음해 권율 휘하의 전라도 군사들이 지키고 있던 행주(幸州)산성 공격전에서 대패함으로써 한성(漢城)을 버리고 남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朝鮮王朝(宣祖) 실록(實錄) 29권 8-9월 조(條)에 이런 대회가 기록되어 있다.

 ’上(임금:선조)께서 김경노(金敬老 안세희(安世熙)를 인견(引見)하심에 승지(承旨) 신점(申點) 가주서(假注署) 강욱(康昱) 봉교(奉敎) 기자헌(奇自獻)이 입대(入待)하다’

 김경노는 개전 당시 경상도 감사 김수의 군관으로 있었다. 뒷날 정유(丁酉)년 2차 전쟁때 남원에서 전사했다.

 선조="그대들은 들은바를 자세히 말하라(여등소문실진지汝等所聞悉陳之)"

 경노="적이 4월14일에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었사온데(적사월십사일유출래치보이 敵四月十四日有出來馳報而)" (중략)

 선조="그곳의 민심이 어떠한고(기허민심하여其虛民心何如)"

 경노="전라도 사람들은 평소 왜명(倭名)을 들었기로 별로 두려워 하지 않사온데 경상도 사람들은 왜적에 관한 일을 들은 바 없기 때문에 그들을 몹시 두려워 합니다.(전라지인소문왜명고외지불심全羅之人素聞倭名故畏之不甚 경상인민미상왜적지사고외지태심慶尙人民未嘗倭賊之事故畏之太甚) 고성에 왜구가 쳐들어 왔을때 마파람이 크게 일어 적을 물리치기 어렵게 되자 백성들이 황겁하게 달아나 버렸습니다.(고성입?지시동풍대기부득토적인민황겁이퇴(固城入時東風大起不得討賊人民惶怯而退)"

 그러나 용인(龍仁)전투에서 문관 이광(李洸)휘하의 전라도 군사 4만명이 1,600여명의 일본군에 패주한 사실이 말해주듯 명장을 만날때 강병이 됨은 물론이다.

 전라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해상활동에 강했다.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쟁패전을 벌였던 기원 직후 고대국가 시대, 고구려는 대륙의 요동(遼東)일대에서 북방민족들과 패권을 다투고 있었고 신라는 반도의 동남쪽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이 시기 오늘의 충청도와 전라도에 강역을 둔 백제는 바다 건너 ’요서군(遼西郡)’이라는 식민지를 건설했고 양자강(揚子江) 유역에 자치구를 확보했다. 일본 열도로 건너가 북구주(北九州)에 사마대국(邪馬臺國야마도)이란 제후국을 건설하고 마침내는 일본 초기국가 건설에 참여한다. 東北으로는 신라에 이르고(至新羅) 西로는 바다 건너 월주에 이르며(도해지월주渡海至越州:양자강 남쪽) 北으로는 바다 건너 고려에 이르고(渡海至高麗:요서遼西) 南으로는 바다 건너 倭에 이르러(도해지왜국渡海至倭國)(구당서舊唐書) 양자강 하구의 동지나해로부터 황해와 발해만 그리고 일본열도까지의 바다를 장악한 동아시아 최강의 해양국가가 되었다.

 백제(百濟)란 ’백가제해百家濟海’에서 비롯되어 이름 자체가 해양국가를 뜻하고 있다.

 특히 전라의 남도, 여수(麗水)지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바다의 용병들이었다.

 백제가 망하고 통일신라 흥덕왕(興德王)때 장보고(張保皐:?~846년)가 서남해안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 한·중·일 3국을 잇는 해상교역의 왕자로 군림했을 때 그를 지탱한 강력한 해군력의 중심세력은 바로 완도일대 여수지방의 졸만인(卒萬人) 이었다.

 장보고는 완도의 호족(豪族)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중국과의 교역에 종사해 온 것으로 전한다. 무재(武才)가 뛰어난 그는 20대에 당(唐)으로 건너가 무녕군(武寧軍)의 장군이 되어 山東반도 문등현(文登顯)일대 신라방(新羅坊)에 거주하는 동족들을 규합, 적산포(赤山浦)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海商)세력을 이뤘다. 신라방은 대부분 충청 전라도 해변쪽 출신 신라인들이 건너가 해상무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적산촌에 법화원(法華院)이란 사찰을 세우기도 했다.

 장보고는 흥덕왕 3년 신라로 돌아와 그 무렵 唐과 倭의 해적들로 부터 신라인 보호를 위해 한·중·일 3국 교역의 요충이고 그의 고향인 완도에 청해(淸海) 즉 바다를 깨끗이 하는 진영(鎭營)설치와 이 지역 ’군정만명(軍丁萬名)’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자신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가 되어 일대의 해상을 지배했다.

 이들 졸만인(卒萬人)들이야 말로 ’해사(海事)에 능(能)’하고 다도해를 비롯한 한반도 서·남해과 중국연안 까지의 해상지리에 밝은 바다의 勇兵들이었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3월18일 게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