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4)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4)
  • 김재춘
  • 승인 2019.10.28 00: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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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開戰)앞둔 조정(朝廷)서 수군(水軍)폐지 기상천외의 논쟁(論爭)벌여

전라좌수가 된 뒤에도 이순신은 간단없이 그를 괴롭히는 안으로부터의 시련에 부딪힌다.

 이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침공하지 않는다고 우겨 조정의 정세 판단을 그르친 김성일(金誠一)이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되어 있으면서 뒤늦게 이순신의 좌수사 발탁이 "좋은 政事가 아니다(非政)"고 논란을 벌였다. 조정 대신들이 선조앞에 대죄(待罪)하는 소동이 일어났으나 다행히 기정사실로 넘기고 말았다.

 이순신이 전쟁이 터진다는 확신을 갖고 밤낮없이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조정에서 기상천외의 소식이 들려왔다.

 水軍폐지론이었다.

 여진족 니탕개(尼湯介)토벌로 명장이 되고 선저와 사돈이 된 신립이 서인(西人)들의 사주를 받아 느닷없이 수군폐지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서인들은 이순신이 동인(東人) 류성룡의 사람인데 그의 군비(軍備)강화를 그대로 둘 때 동인 세력이 커지는게 아니겠느냐는 엉뚱한 발상으로 신립을 꼬여 아예 수군 폐지를 주장케 했던 것이다. 국가운명보다 당장(黨爭)우선의 기막힌 사연이었다.

 "수군을 강화하는 일은 일본에 전쟁 구실만 주게 됩니다. 설사 일본이 쳐들어 온다 해도 일본은 섬나라라 수군이 강합니다. 우리 수군으로는 어차피 막지 못합니다. 차라리 육군을 강화, 육지에 올려놓고 쳐부수는게 유리합니다. 수군을 폐지케 하옵소서" 신립의 상소였다.

 이순신이 반박 상소를 올렸다.

 "수군은 바다에서 막고 육군은 뭍에서 막아야 합니다. 어느 한 쪽도 없애서는 안되오니 통촉하옵소서"

 수군폐지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풍신수길의 조선 침공군 10만 증원군이 서해(西海)를 돌아 금강(錦江), 한강(漢江), 대동강(大同江)으로 침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할 조선의 남해는 일명 다도해(多島海)라 부른다. 전라도 해안쪽에 1천840개, 경상도쪽에 400여개, 모두 2,240여개 섬군(群)이 동쪽으로 대마도(對馬島), 서쪽으로 흑산도(黑山島), 남쪽으로 제주도(濟州島)의 큰 섬 사이 7만5천㎢의 넓이 않은 바다에 밀집도이ㅓ 있다. 바다보다 섬이 더 넓다고 할까.

 서해안 또한 세계적인 리마스식해안으로 굴곡이 몹시 심해 해안선의 연장이 직선거리 8.8배의 굴곡률(掘曲率)을 보여 세계 지리학계에서 ’한국식 해안(korean coast)’으로 따로 분류하고 있다.

 섬의 밀집도(密集度)와 해안선의 굴곡률에 있어서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바다는 연중 환류가 북쪽으로 흘러 수온이 따뜻함으로 바닷고기의 산란장이며 일년내내 고기가 잡히고 섬들에는 환대성 식물이 무성하게 자란다.

 특이한 것은 이들 섬들 모두가 육지의 구릉이나 산맥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 앉았다가 다시 솟아 생긴 것으로 배열이 육지와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바다 밑에 턱이 되어 있거나 섬 사이가 좁은 곳은 급류가 흐른다. 명량(鳴梁)대첩을 이룬 진도(珍島)의 울돌목이 그런 곳이다.

 남해 해로는 바로 다도해의 미로(迷路)를 헤치며 다니는 뱃길이다.

 이순신은 다도해의 복잡한 해로를 손바닥 보듯하며 지리(地利)를 취해 일본 수군을 유인, 궁지로 몰아 넣고 소규모 조선군 함대로 대규모 일본군 함대를 공력, 번번이 승리를 거두었다.

 방어하는 조선 수군에는 천험의 바다 요새였던 것이다.

 조선은 전라도 해안을 둘도 나누어 좌도(여수麗水)와 우도(해남海南)에 각각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수사水使)를 두고 휘하에 첨절도사(僉節度使:첨사僉使) 동첨절도사(同僉節度使) 만호(萬戶) 별장(別將) 등을 두었고 경상도 역시 좌도(동래東萊)와 우도(고성固城)로 나누어 수사와 장수들을 두어 남해를 지키게 했다.

 그런데 개전 초기, 일본군 주력의 부산 상륙을 바다에서 막았어야 할 경상도 수군이 싸우지도 않고 모두 흩어져 도망가 버렸다. 그 바람에 일본군 주력은 전력 손실없이 대거 육지로 진공, 평양까지 쳐올라가 서해로 돌아 江을 따라 들어올 예정의 증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나 다도해의 미로에서 전라도 수군 이순신 함대에 의해 진로가 차단되어 평양의 일본군이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지게 되고 마침내는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참담한 패주를 거듭하게 된 것이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3월18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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