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2)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 무적함대 (2)
  • 김재춘 기자
  • 승인 2019.10.23 0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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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성품 아첨·타협(妥協)몰라 영전 좌천(左遷) 거듭

 37세때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成박이 발포진 뜰의 오동나무를 베어 오라고 병사들을 보냈다. 거문고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나라의 재물’이라며 순신이 거절했다. 괘씸하게 생각한 성박이 후임 李용에 “상관을 우습게 아는 사람”으로 인계, 이용이 그의 근무평정을 ‘下’로 매겨 파직시키려 했으나 순신을 잘 아는 전라감영 도사(都事) 조헌(趙憲)이 해명, 위기를 면했다.

 38세때 1월 서익이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 검열관)으로 와 생트집을 잡았다. 훈련원 때의 앙심 때문이었다. 순신은 그 생애 첫번째의 파직을 당한다. 그해 5월 3년전의 직책인 훈련원 봉사로 복직된다.

 39세때 7월 함경도 남병사(南兵使)가 된 이용이 그를 군관으로 기용했으나 10월에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좌천된다. 7년 전 임관때의 벼슬로 주저앉은 것이다.

 건원보 권관 한달만에 악명 높은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사로 잡았다. 그런데 그의 전공을 시기한 상사가 명령없이 독자적인 작전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상신, 자칫 또 파직될뻔 했으나 조정이 功도 罪도 아닌 것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42세때 1월 아버지 3년 상(喪)으로 군직을 떠났던 이순신이 사복시 주부(司僕寺 主簿 종6품)가 된다. 사복시란 궁중의 가마나 말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곧이어 함경도 조산 만호(造山 萬戶)가 된다. 4년전의 벼슬로 다시 올라간 것이었다.

 43세때 8월 두만강(豆滿江)의 외로운 섬 녹둔도(鹿屯島) 둔전관(屯田官)을 겸하고 있는데 여진족이 쳐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 6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순신이 즉시 반격에 나서 적장 4명을 죽이고 재물과 백성을 되찾아 왔으나 군사 10여명이 전사하고 수십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자신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그런데 북병사 이일(李鎰)이 순신을 참(斬)하려 했다. 경비를 소솔히 하여 패전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순신이 여러차례 녹둔도의 병력보충을 요청했는데도 이일이 들어주지 않았던 잘못이 드러날까 염려하여 패전으로 몰아 순신을 제거해 버리려 했던 것이었다.

 이에대해 순신은 여진족의 기습은 이일이 병력충원을 해주지 않았던 때문이라며 결연히 맞섰다.

 조정이 판정을 내려 파직과 백의종군(白衣從軍)을 명했으며 졸병이 된 순신은 그해 겨울 시전(時錢)전투에서 공을 세워 사면되고 군직을 회복한다.

 45세때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고 그를 아낀 이광이 부장(副將)격인 조방장(助防將)까지 겸직시켰다가 12월에 문관직인 정읍(井邑)현감으로 발령한다.

 그의 일대기가 말해주듯 그의 군대생활은 결코 평탄치가 않았다. 영전과 좌천이 거듭되었다. 뒷날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인한 것까지 20여년의 군대생활동안 세차례의 파직과 두차례의 백의종군을 한 경력을 가졌다.

 그의 강직한 성품때문이었다.

 윗사람의 지시라도 부당하면 듣지 않았고 때로는 매섭게 반발했다. 어떤 직책이든 주어진 입무에 혼신의 정열을 다할 뿐 실력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덕수 이(德水 李)씨 집안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있을때 유성룡을 통해 한번 만나보기를 청했으나 율곡이 인사권을 갖고 잇는 동안은 만날 수 없다고 사양했다. 서익 사건으로 화제가 되어 김귀영이 딸을 준다 했을때도 “벼슬길에 갓나온 내가 어찌 권세있는 가문에 발을 들여 놓으랴”면서 거절했다.

 상사가 오해를 해도 찾아가 해명하지도 않았다. 미움받고 쫓겨 다니기 딱 알맞았다. 좌천을 시켜도 그대로 가서 직무에 충실했고, 부당하게 파면을 해도 그대로 집에가 쉬었다. 복직운동 따위는 일체 하지 않았고 누구를 비난하거나 반감을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서익에 의해 파직되어 서울집에서 쉴때도 활터에 나가 무예를 닦는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활터서 정승 柳전을 자주 만났다. 순신의 화살통(箭筒)을 탐낸 유전이 줄 수 없느냐 물었다.

 “전통 하나로 대감과 저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복직운동의 절호의 기회였으나 그는 그럴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나라가 나를 쓰면 목숨을 바쳐 일할 것이고, 쓰지 않으면 농사나 짓는다’

 그의 좌우명이었으며 좌우명대로 타협없이 강직하게 살았다.

    

 양재숙(梁在淑) 본사 수석논설위원 

  옮긴이 김재춘(金在春)

 1992년 3월1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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