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도 전북(藝都 全北)’ 자화자찬인가?
‘예도 전북(藝都 全北)’ 자화자찬인가?
  • 이정희
  • 승인 2019.10.0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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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인들은 누구랄 것 없이 전북을 표현할 때 ‘예도(藝都)’ 또는 ‘예향(藝鄕)’이란 용어를 자연스럽게 앞에 붙인다. 화가(?家)로 활동하고 있는 필자 역시 우리고장 전북을 이야기할 때 이런 표현을 특별한 의식 없이 사용해왔다. 아마 앞으로도 변함은 없을 듯하다.

 최근, 필자는 자문하고 있다. ‘진정 전라북도는 예도가 맞는 것인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지역인가?’ 문화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북은 한국을 대표하는 예도임에는 분명하다. 한국 5대 고전소설인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변강쇠전, 별주부전 중 춘향전과 흥부전, 변강쇠전은 남원을 배경으로, 심청전은 부안을 각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고전소설들은 또 판소리로도 전승, 서민들의 삶 속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글로벌사회에서 한복(衣)·한식(食)·한옥(住)·한지(文, 종이)·한국소리(音, 판소리)·한국무술(武, 태권도) 등 ‘6대 한브랜드(Korea Brand)’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한(韓)브랜드의 중심이 바로 전북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명쾌한 답을 아직껏 찾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위안 삼기 위해 예도인(藝都人)이라 자화자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필자가 이런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은 전국에서 차지하는 전북문화의 위치 때문이다.

 한 나라의 문화(文化)는 다양한 지역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색(色)과 음률(音律), 몸짓(律動), 형태(形態)로 나타난다. 유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축적된 사람사는 이야기이자 역사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문화는 그렇지 못하다. 지역의 다양성은 무시되고 수도권문화(서울·경기)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인 양 치부되고 있다.

 문화예술은 자생력이 약하다. 정치, 경제, 사회 등과 함께한 그릇에 비벼질 때 꽃을 피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매년 문화예술인 지원 공모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결과는 뻔했다. 서울·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 집중됐다. 반면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철저하게 소외시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공모사업 선정 결과’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총 2,683건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수도권에 1,929건을 몰아줬다. 무려 71.9%(서울 57.4%, 경기 14.5%)에 달했다. 부산(4.3%), 전북·광주·충북·경남(각 2%대), 전남·경북·충남(각 1%대), 울산·제주(각 1% 미만) 등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는 생색내기에 그쳤다. 금액으로 보면 총 600억 원 중 수도권에 370억 원(61%)이 집중됐다. 나머지 230억 원을 가지고 전북을 비롯해 전국 시·도에 사탕 주듯 나눠줬다. 올해라고 나아진 것은 전혀 없다. 지난 8월 기준으로 볼 때 수도권에 무려 68%(서울 53.3%, 경기 14.6%)나 몰아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문화예술인 사이에서는 ‘지원신청하면 뭐하냐. 지방은 수도권 들러리나 설 뿐인데’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A 국회의원은 “문화예술지원에 있어 수도권과 지방간 불균형현상이 너무 심하다. 불균형 해소를 위해 지역 맞춤형 공모사업을 확대와 ‘지역쿼터제’를 도입하는 것이 지역문화의 차별성과 다양성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지방정부의 세심한 배려도 함께 요구된다. 문화예술인들은 행정에 어둡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하는 문화예술인은 많지 않다. 각종 문화예술 공모 등 지원사업이 있을 경우 사전에 지역문화예술인들에게 SNS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공모내용과 지원방법 등을 알리자. 선순환적 문화정보교류가 이뤄진다면 전북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국민이 있어야 나라가 있다. 도민이 있을 때 전라북도가 있고, 시민과 군민이 있을 때 시와 군이 있다. 지역문화예술인을 귀찮은 존재로 여긴다면 ‘예도 전북(藝都 全北)’의 미래는 담보할 수 없다. 필자가 자문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 애써 위안 삼기 위한 자화자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희<전주대 평교 미술아카데미 교수/수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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