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갈증, 차를 마시며 달래다.
소갈증, 차를 마시며 달래다.
  • 이창숙
  • 승인 2019.10.06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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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61>
피어난 찻잎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45년간 여섯 임금을 섬겼다. 그는 세조가 대군이었을 때부터 친밀했으며 육조 판서를 두루 거쳐 대제학을 무려 23년 동안이나 했다. 개인 저술외에도 『경국대전』,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문선』 등의 편찬에 관여하였다. 당시 세조의 왕위 찬탈에 개탄하며 방랑의 길을 떠돌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김시습에게 종종 봉변을 당하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명신록(名臣錄)』에 전해진다.

  서거정이 가마를 타고 가다 김시습과 마주쳤다. “어이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 잘 지내시 나”라고 하자. 옆에서 서거정을 수행하던 관리가 그의 무례함에 대한 죄를 물으려 했다. 그러자 서거정은 “이보게,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진다는 건가. 만약 이 사람을 벌한다면 백 년 뒤 그대 이름에 누(累)가 될 것이야.” 이렇게 만류하고 그 자리를 떴다고 한다.

 서거정은 김시습이 봉변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다. 김시습은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정도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훗날의 평가는 다르다. 김시습의 ‘절의’에 주목한 정조는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 청간공(淸簡公)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서거정은 화려한 자신의 업적에 비해 후진 양성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이렇게 달랐지만 이들 모두 차 마시기를 즐겼다.

  서거정은 질병을 달래기 위해 차를 많이 마신듯하다. 문인으로서 관료로서 한 시대를 지배했지만 두통과 소갈병에 시달렸다. 자신의 병이 시마(詩魔)와 주마(酒魔)에 있다는 것을 보면, 술 마시기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다음은 “병을 얻다(移病)”는 시이다.

 

  “하늘의 짓궂은 장난 내가 어찌하랴 힘들고 어려움 속에 병까지 침범하누나.

  가랑비에 남쪽 창가 맘에 들어 아이 불러 돌솥에 햇차(茶)를 끓이게 하노라.

  병이 들어 복채 주고 점을 쳐보니 그 빌미가 시마(詩魔)와 주마(酒魔)에 있다고 하네.

  괴이해라 마(魔)를 보내도 가지 않으니, 해묵은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그는 소갈병과 두통의 발생 원인을 알아내고 치유법을 궁리하는 등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시를 쓴다. 어느 때는 병이 주는 휴식과 성찰의 시간을 고맙게 여긴 것으로 보아 과다한 업무에도 시달렸던 것 같다. 조선의 관료들은 하루에 길게는 12시간, 짧게는 8시간 일을 하였다. 무단으로 지각하거나 조퇴할 경우 태형에 처해 졌으며, 병이 난 경우에는 병가를 낼 수 있었다. 서거정은 병가를 내며 질병 치료에 힘을 쏟는다. 이에 주변 관료들 사이에 소문이 난 듯하다. 다음 시는 전남 장성의 현감 박태수가 차(茶)를 부쳐준데 대하여 감사를 표하는 시이다.

 

  “몇 년 동안 소갈병을 어찌하지 못하였는데 자상하여라, 그대가 좋은 차를 부쳐 주었네.

  돌솥에 설설 끓이니 게의 눈 일어나고 수마(睡魔)를 쫓고 나니 시마(詩魔)가 찾아오네”

 

  그는 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을 졸이며 옛 처방을 따라 해도 효과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병만 더 심해졌다는 등, 도가의 불로불사약을 먹었는데 이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등 여러 가지 치료법을 두루 써 보아도 병을 치료할 수 없음을 한탄한 시도 있다. 또한 내용 중 “폐가 상한 이유는 술을 좋아해서이니 요즘은 목마르면 앉아서 차(茶)나 흠씬 마신다네. 백 년 사는 인생은 혼연히 잠시 살다 가니 마음을 쓰지 말고 자연에 부쳐야지.”라며 결국은 이런저런 약 처방이 소용이 없어 차(茶)나 실컷 마시기로 한다는 내용으로 그에게 차는 어떤 금단(金丹)보다도 낫다는 심정을 밝히고 있다.

 

 / 글 = 이창숙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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