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로 낙관하려면 먼저 이성으로 비관해야 한다
의지로 낙관하려면 먼저 이성으로 비관해야 한다
  • 정진오
  • 승인 2019.10.03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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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갈등 해법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본필승론’을 내세우는 등 친 일본 우익교육으로 말썽을 빚은 공립 고등학교 교사가 논란을 빚고 수업에서 배제됐는가 하면,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망언을 서슴지 않은 연세대 류석춘 교수에 대한 비판 여론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열쇳말은 ‘친일’이다.

  ‘친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말만 들어도 공분해야 마땅할 일인 텐데 그렇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현실에 슬픔과 분노가 차오른다. 류 교수가 한 때 혁신위원장을 지낼 만큼 자유한국당 안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행동은 결코 개인의 돌출 행동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과 교육계를 비롯해서 우리 사회 곳곳에 아직까지도 일본의 아베 정권이나 다름없는 생각과 정서와 관점을 가지고 있는 ‘친일 세력’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좀처럼 내려놓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일제강점기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질문을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출발점이 잘못되면 목적지가 어디인지, 어떤 방법으로 다다를 것인지가 달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목적지에 이르는 거리와 도착 시간이 달라지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대답이 필요하겠지만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보자. 제국주의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아픔을 남겼다. 제국주의 일본은 꽃다운 여성들을 일본군 성노예로 강제 동원해 착취하고 살해했고, 수백만 명의 남성들을 군대와 노역장으로 강제 징용하고 살해했으며, 우리 고유의 민족 문화를 말살했고, 한반도를 철저히 병참기지로 전락시켜서 경제를 파탄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교육과 직업 선택의 불평등과 사회적·법적·제도적인 불이익 등을 한 세대 넘게 확대재생산해서 우리 민족공동체 전체의 화합을 해치고 분열을 조장하는 ‘악의 씨앗’을 잔뜩 심어놓았다. 이는 결국 일제의 식민지 잔재가 이 땅에서 한 줌도 청산되지 못하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작용했고, 한국전쟁과 미군정기를 거친 뒤 친일의 후손들은 다시금 우리 사회 기득권의 한 축으로 세력을 공고히 해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같은 민족과 시민들을 겨냥해 틈만 나면 우리 민족의 자존과 자강과 자립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박근혜 정권이 왜 그리도 역사를 다시 쓰려고 몸부림쳤는지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제 통일시대를 준비해야 할 이 땅의 평화와 사회 개혁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그 출발점은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해졌다고 생각한다. 단 한 사람의 몸에 난 상처와 트라우마도 그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끝없는 쓰라림과 아픔을 남기고 끝내는 존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우리 민족 전체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클 것인지는 가히 짐작조차 하기 힘든 이유이다. 이제 그 오욕의 역사를 보듬어 안고 치유하기 위해 각자가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생각해야 할 중요한 때이다. 비록 일제가 심어놓은 ‘악의 씨앗’이지만 그 씨앗에 물을 주고 꽃을 피운 우리들 역시 ‘당사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분석하고 판단한 뒤, 잘못된 현실을 바꿔나가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어렵겠지만 명랑하게 웃으면서. 그러므로 ‘역사 바로 세우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진오, 책방 ‘오래된새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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