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타인들 속에서
낯익은 타인들 속에서
  • 이흥래
  • 승인 2019.09.29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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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이 지난 며칠후 친구로부터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고교와 대학을 같이 나오고 전주에서 직장생활도 같이한, 늘 만나온 친구라서 딱히 반갑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지만,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한달여 이상 병원신세를 지고 있던 친구의 전화였기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뜸 나를 알아보겠느냐는 내 질문에 그 친구는 아주 잘 기억난다고 힘차게 얘길 했지만, 내 보기에 아직도 상태는 100%까지 확실히 회복되지는 않은 듯싶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그래 너 대단하다는 말만 되풀이한 채 통화를 마쳤다.

나 역시도 그렇지만 이 친구도 술을 대단히 좋아해서 아내를 비롯한 주변의 걱정을 퍽 많이 하게 했는데, 나이를 먹어서도 예전처럼 마셔대니 한달여 전 기어코 사달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과 운동을 같이 한후 한잔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삼천 주변의 집으로 가려다 제방 계단에서 굴렀던 모양이다. 다행히 천변에서 운동하던 사람이 있어서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뇌에서 몇 군데 가벼운 출혈이 생겨 한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때는 상당히 심각한 듯 보였다. 그렇게 중한 상태는 아니라서 이삼일 후 일반병실로 옮겨 우리들이 면회를 갔지만, 이 친구는 수십년간 같이 놀아온 친구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한채 딴소리만 할 뿐이었다. 누군지 알겠느냐는 질문에 이 친구는 그저 사람이라는 대답만 하곤 해 가족들과 문병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나 역시도 몇차례 문병을 가서 휠체어에 그를 싣고 병원 근처를 다니면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물어보았지만 내가 누군지를 도통 알아보지 못했다. 얼굴을 마주보며 내가 누구라고 말을 해도 그 무렵 그 친구에게 나는, 얼굴은 익숙했지만 도통 누군지 알 수 없는 그런 타인이었을게다.

머리를 다쳐서 한동안 사람을 못 알아본 또 다른 친구도 있었다. 직장 야유회에 다녀오던 고등학교 동창녀석 하나는 머리 반쪽이 거의 깨지다시피한 대형 사고를 당했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 친구 역시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상당한 시일이 흐른 후 호전됐다기에, 몇몇 친구들이 문병을 갔었는데 찾아간 친구들의 이름이 제각각이었다. 나는 다행히 이선생이라고 불러줬지만 어떤 친구는 이름과 성이 다르거나 또는 이름과 성의 글자가 뒤바뀌는 등 제멋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은 그 녀석을 수술할 때, 뇌 가장자리에 기억됐던 이름들은 떨어져 나갔고, 누구는 세포가 잘못 붙는 바람에 이름이 뒤바뀐게 아니냐며 지금까지도 그때 바뀐 이름을 불러대며 웃곤한다. 이처럼 머리를 다친 친구들이 생겨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병원에 가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거나 신체 기능을 회복하지 못한채 투병중인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문명의 발달로 움직이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외상을 입는 경우도 많지만 스트레스성 질환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내 주변을 돌아봐도 직장생활 은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고 사회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데 대한 울분도 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건강하게라도 생활하면 다행이지만 그중에는 병원신세를 지는 친구들도 자꾸 생겨나 마음이 아프곤 한다. 이제라도 건강을 되찾고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해보길 기대하지만 세상은 어디 그러한가.

 기억을 잃고 투병 중에 있거나 또 그런 환자로 인해 고통받는 가족들에겐 절대 몹쓸 소리지만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엔 가끔쯤은 이런저런 생각과 기억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잦다. 요즘 들려오는 소리 좀 들어보자. 먼저 경제가 어려워 못살겠다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려온다. 세계가 냉전체제로 다시 돌아가는 양 미국과 중국이란 초강대국들의 패권 등쌀에 치이다 보니 우리같은 약소국의 경제는 추풍낙엽처럼 흔들리고 있다. 강대국 지도자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세계 주식시장이 출렁거리고, 양 국가는 물론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경제가 도미노처럼 불황의 여파 속에 젖어드는 모양새다. 거기다 우리와는 가장 밀접한 국제협력관계에 있는 일본마저 한국 때리기에 혈안이 돼 있다 보니 국내 경기는 더욱 쪼그라들고 있다.

지금 당장은 일본산 불매다 뭐다해서 버텨가고 있지만 이게 버틴다고 될 일일까. 경제는 심리라는 말이 있듯이 좀 어려워지네 하는 말만 돌아도 모든 게 위축되기 마련이다. 가끔 전주 시내를 나가보면 얼마전까지만 해도 영업중이었던 많은 상가가 임대나 매각이란 이름아래 문을 닫고 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처럼 경기가 나빠지면 꼭 나오는 말이 정치가 잘못돼서 나라가 이 모양이라는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절망해 촛불을 들었던 수많은 국민의 환호성은 어디로 가고, 요즘 정치판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이전투구의 참담함 바로 그 현장이 되고 있다. 무지막지했던 군사정권 아래서도 어떻든간에 대화가 오갔지만 요즘 정치판은 여야의 대화가 완전히 단절된 채 서로 말꼬리 잡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 서로 존재를 인정하는 품격이나 존중은 커녕 위아래도 없는 그야말로 난장판인 정치실종의 시대에 놓여있다.

특히 조국 법무부장관의 임명을 둘러싸고 지난 두달여 이상 벌어진 찬반양론의 공방은 과연 우리 사회가 다시 통합된 사회체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다. 여야 모두 여기에서 밀리면 이제 끝이다는 절망적인 정치판의 행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모습이 내년 4월의 총선까지 이어질 모양이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럽지 않겠는가. 오죽했으면 요즘 시중에선 촛불혁명 당시 나돌았던 이게 나라냐는 말에 이어 이건 나라냐 하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고 한다.

정치와 경제가 이렇게 혼란스런 터에 우리 사회는 지금 남북관계의 개선이나 사법 개혁 그리고 교육개혁과 사회 양극화의 해소 등 그야말로 해결이 시급한 온갖 과제가 산적해 있다. 과연 이 난제를 누가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우리 사회는 이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은 기억도 생각도 하지 않는 먼 여행을 떠나버리고 싶다. 이게 모두 낯은 익지만, 생각은 전혀 다른 타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흥래 <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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