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 서정환
  • 승인 2019.09.25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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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만남의 관계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물론 엄마, 아빠를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는 등등. 즉 만남이라는 관계가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독일 사상가 마르틴 부버는 말했다. 인간이 맺는 관계를 두 종류로 분류해 놓고 그 종류는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라고 말한다.

 ‘나-그것’의 관계는 기능적인 관점에서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때 상대방은 동일하거나 더 나은 기능을 가진 다른 사람으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으며,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만 유용하다. 반면에 ‘나-너’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로,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나’와, 역시 대체 불가능한 ‘너’의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온 마음을 기울이는 관계이며, ‘너’를 나의 의도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나-그것’의 관계에서 주로 일어난다. ‘나-너’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고, ‘나-그것’의 관계는 쓸모의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상대방을 현존하게 하지만, ‘나-그것’의 관계는 눈앞에 있는데도 상대방을 유령처럼 만든다.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기능일 뿐이지 ‘그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는 ‘너’라는 의미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용도’라는 의미일 뿐이다. 나에게 불필요한 ‘너’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나’ 역시 ‘너’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큰 상실은 ‘나-너’의 만남을 잃는 일이다. 그때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거래이다. 내가 종종 경험하는 작가와 출판사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듯이, 거래에서는 순수 존재로서의 ‘나’보다 상품 가치로서의 ‘나’가 우위에 선다. 회사에서 마케팅회의 때는 ‘타깃’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데 독자가 판매의 목표물인 ‘그것’으로 전락하는데 출판사로서는 늘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독자들과의 만남에서는 ‘나-너’의 관계가 가능하다. 그중의 어떤 만남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작가의 행복은 책이 얼마나 판매되었는가가 아니라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너’의 순수 관계이다. 모든 관계의 불행과 갈등은 ‘나-너’의 관계가 되지 못하고, ‘나-그것’이 됨으로써 온다고 부버는 지적했다. 용도와 기능이 존중받아도 존재가 무시되면 진정한 관계가 불가능하다.

 마르틴 부버는 “만남은 결코 존재의 모자람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만남이 존재를 발견하게 한다.”는 말을 했다. 만남을 통해 존재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온전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온전히 존재하게 만드는 너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이다.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이것은 ‘나’ 중심주의로부터의 해방이다.

 물론 ‘그것’ 없이 인간은 살 수 없지만 ‘그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부버는 말한다. 설령 대상이 사물이나 동물이라고 해도 온 마음을 기울이면 ‘나-그것’이 아닌 ‘나-너’의 관계로 전환된다. 반려견과 식물이 행복감을 주는 이유이다. 존재의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것이 ‘나-너’의 관계이다.

 참된 삶은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도구화되며, 나의 참다운 존재를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참다운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도 ‘나-너’의 관계는 필수적이다. 인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관계의 목적은 관계 그 자체, 곧 ‘나-너’의 만남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하더라도 ‘나-그것’의 관계가 지배적인 사람은 행복으로부터 거리가 멀 수밖에 없지 않을까.

 서정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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