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청산’에 앞서 알아야 할 것들
‘친일 청산’에 앞서 알아야 할 것들
  • 김창곤
  • 승인 2019.09.23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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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아닙니다. 경기용품도 ‘국산’으로 의무화돼 올해 초 바꿨어요.” 게이트볼은 T자 채로 공을 쳐 게이트들을 통과시키는 경기다. 프랑스 양치기 운동이 영국 크로케로 개량됐다가 일본에서 실버 스포츠로 창안됐다. 그 동호인들이 분통을 터뜨린다. 한 단체가 게이트볼을 파크골프와 함께 ‘일본 스포츠’로 지목해 경기장 신설 및 경기 지원 중단을 주장한다. 김원식 전북게이트볼협회장은 “남녀노소 3대 가족 스포츠로 전북 등록회원만 3,000여명”이라며 “게이트볼을 없애면 노인 의료비부터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 스포츠 반대는 식민잔재 청산과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서 비롯됐다. 일본 스포츠용품 불매를 주장하며 전통놀이를 대안으로 내놓기도 한다. 전북파크골프협회는 “우리 종목도 장애인 경기에서 노년 스포츠로 발전하며 국산화가 한창 진행중”이라며 “굳은 몸에 제기차기할 수 있느냐”고 되묻는다.

 ‘반일’ 불똥이 스포츠로 튀었지만, 우리 스포츠사에서 일본을 떼낼 수는 없다. 구한말 개화 문물로 들어온 근대 스포츠는 일제 강점기 정비되고 조직됐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펼친 첫 조선야구대회가 전국체전 기원이다. 체육이니 운동이니 연습이니 경기니 헝그리스포츠니 하는 말과 축구·야구·농구·배구·탁구·체조 등 종목 이름들이 일본에서 왔다. 야구만 해도 투수·포수·주자·선발·타격·안타·맹타·만루·포볼·타율·방어율·득점에서 우세·열세·우승·신승(辛勝)·석패·데드볼·러닝홈런까지 모두 일본서 만든 말이다.

 한자어를 중심으로 우리말이 된 일본어 영역은 체육에 머물지 않는다. 개인과 가족, 가정·학교·회사·국가·국민·세계, 시간·시각·요일, 장소·공간·건물·광장·주소, 시장·공원·광장·은행·주차장 등 숱한 일상 단어가 일본에서 건너왔다. 사상·이념·이상·이성·이론·합리·진리·가치, 이유·동기·목적·목표·원인·결과, 자본·노동·상품·품질·수요·공급·유통·가격·조건·제한에서 낭만·짝사랑·연애·감정·애인·신혼여행·불륜·인간성·인격·인권 등 온갖 명사가 일본에서 시작됐다.

 대통령과 정부, 국회는 물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철학 수학 과학 물리 화학 법률 행정 보건 복지 환경 등 단어와 이들 분야 용어 대부분이 일본에서 번역됐다. 전국과 지방, 독립과 자치, 자유·민족·민주·공동체, 그리고 ‘△△주의(主義)’란 말도, 국어·명사·동사·형용사·단어·어휘란 말도 일본에서 들어왔다. 근대화가 늦은 중국도 대부분 함께 쓰는 말들이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사람과 제도 토대에 세운 나라다. 진보 원로로 불리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까지도 “일제 식민 잔재 청산은 국가와 사회 몸체를 청산한다는 것을 뜻하며 정부가 이를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위선’”이라고 했다. 그는 “가능하지 않은 것을 옳다고 말하며 그것을 위해 행동하려 하지만, 실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기획일 뿐”이라고도 했다.

 이승만은 과오가 적지 않지만, 한국은 그의 한미동맹과 미국의 원조로 기틀을 다졌다. 박정희는 한일협정 이후 일본 기술과 자본을 들여와 세계사에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이뤘다. 그럼에도 현실과 무관한 ‘친일’ ‘친미’ 낙인은 끝없다. 많은 제조업 상품이 ‘메이드 인 코리아’나 ‘재팬’ 아닌 ‘메이드 인 월드’이다. 상산고에서 겪었듯 좌파는 평등을 내걸며 뺄셈과 청산을 일삼지만, 그보다 어려운 게 경쟁과 혁신, 분업과 협력, 개방과 포용이다.

 구한말 서울 동소문 밖 첫 축구 경기 사진을 들여다본다. 벌판이다. 골문 대신 돌이 놓였다. 무명 조끼에 갓을 쓴 선수도 있다. 운동장이나 선수 연령, 인원 기준은 없다. 선수들이 몰려다니고 망건 쓴 심판이 공을 따른다. 남루하고 애처롭다. 그 나라가 한 세기 만에 올림픽을 두 번 치렀다. 이곳에서 스포츠마저 친일과 반일로 나누려 한다.

 김창곤<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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